▶ 모교 이화여대에 10만달러 기부한 송미숙씨
▶ 컴퓨터 부품판매·부동산투자가로 열정과 도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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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구·부품 트럭에 싣고 다니며 직접 부동산 관리
▶ “받은 축복 한인사회에 나누고 싶어” 꾸준한 봉사
뉴저지한인회 현 이사장으로 봉사를 하고 있는 송미숙(미국명 미셸 송) 씨가 미국에서 열심히 일해서 모은 10만 달러를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해 화제가 되고 있다. 고되고 힘겨운 이민자의 삶 가운데 흘린 땀방울이 이제는 후배들의 꿈과 미래를 밝히는 희망의 씨앗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의 기부 소식은 모교뿐 아니라 미주 한인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 것은 단순한 금액이 아니라, 열심히 일한 인생의 결실을 ‘다음 세대에게 돌려주는 사랑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눔과 베품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확실한 본보기였다.
이화여고에 이어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송 씨(’88)는 “태어난 환경은 선택할 수 없지만 배움은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배움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기에 그 기회를 더 많은 학생들에게 돌려주고 싶었습니다”라며 거액의 이번 장학금 기부 배경을 밝혔다. 그녀의 기탁으로 설립된 ‘Michelle Misook Song Scholarship Fund’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학업을 이어가는 학생들에게 앞으로 든든한 디딤돌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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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도전과 끊임없는 노력
송미숙 이사장의 삶은 끊임없는 도전과 극복의 연속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컴퓨터 부품을 취급하는 무역회사에 취직했으나,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한 푼의 월급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주변의 권유로 사업자 등록을 하고 직접 컴퓨터 부품을 수입하면서 사업가로의 길을 걸었다.
1995년,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삼성과 LG 반도체, 인텔과 AMD 등의 메모리와 CPU 및 컴퓨터 부품을 판매했다 초기에는 큰 성공을 이뤘지만 2000년 이후 닷컴 붕괴와 함께 컴퓨터 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송 이사장은 이러한 쓰라린 경험을 자신의 성장과 사업 기반을 다지는 귀중한 밑거름으로 삼았다.
2000년대 부동산 경기가 호황일 때 집들을 한 채씩 사서 수리해 매매하면서 본격적인 부동산 투자가로 나섰으나 2007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경기침체는 또 다시 그녀 앞에 큰 시험으로 다가왔다.
팔리지 않는 집들이 늘어나 고민하던 그녀는 과감하게 수십채 하우스를 렌탈로 전환하고 불량 세입자 관리, 현장 수리까지 직접 감당했다. 청소는 기본이고 페인트칠, 타일 작업 등 생전 안해 봤던 일들을 공사 현장에서 직접 인부들과 같이 일을 했다
그래서 트럭을 타고 종횡무진하는 그녀를 종종 목격한다. 트럭 안에는 늘 공사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공구와 복잡한 부품들로 가득하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수리는 본인이 직접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절약해야 더 많은 단체에 기부를 할수 있어서라며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주신 부모님과 하나님께 언제나 감사드린다는 송 이사장. 그런 소탈한 평상시 모습 때문이었는지 가짜 이대 졸업생 아니냐는 루머까지 나돌아 한인사회 몇몇 분들에게 적지않은 실망도 했지만 그래도 한인사회에 대한 사명감이 앞서 꾸준한 봉사를 하고 있다.
삶에 대한 그녀의 도전과 열정은 그의 도전 정신은 언제나 뜨거웠다. 쉬지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의 삶은 마치 성실하게 쌓아 올리는 개미의 성실함과 인내를 떠올리게 한다. 그 결과, 그는 지금 한국과 미국에 적지 않은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제 그 결실을 후배와 커뮤니티를 위한 나눔으로 승화시키려 한다.
■봉사와 나눔, 한인사회의 모범
송 이사장의 삶은 사업적 성공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지난 20여 년간 KCC 전신인 FGS, 뉴저지한인상록회, 에디슨 SYK 커뮤니티센터, 뉴저지한인회, 뉴욕평통 등의 단체에서 이사, 부회장, 수석부회장, 코리안페스티벌 김치축제 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코비드기간에는 코로나19 재난대책 본부장으로 핫라인을 운영하면서 한인커뮤니티에 다양한 봉사활동에 참여하며, 지역사회 발전과 세대 간 연결에 힘써 왔다.
또한 여성의 참여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 하에 한미여성연맹(Korean American Women in Action)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하여 여성 지도자 후원과 K 문화 교류 및 보급에도 힘을 쓰고 있다.
송 이사장은 현재는 8만스퀘어피트의 부엌 캐비넷 공장을 주 사업으로 하고 있지만 시간을 쪼개 공사 현장 관리와 부동산 투자, 커뮤니티 행사 참여, 그리고 시니어 댄스강습 등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다 챙기고 있다.
3남매중 장녀로서 언제나 살림 밑천이 되려고 버텨온 책임감과 사명감을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다. “이제 제가 받은 큰 축복을 한인사회와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라며 한인사회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그래서 2년 전 양보했던 한인회장의 꿈도 이번에는 펼칠 예정이다.
■배움과 나눔으로 세대 이어가는 삶
송 이사장의 모교 장학금 기부는 후진 양성과 대학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이며, 그가 오랫동안 꿈꿔온 뉴저지한인회관 건립 또한 머지않아 꼭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푼씩 모은 돈 10만달러를 흔쾌히 남에게 기부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지역사회 봉사, 그리고 후배를 향한 나눔으로 이어지는 그 삶의 철학이 한인사회와 이민자 모두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송 이사장의 이같은 기부가 한인사회에 모범적인 사례로 우리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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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상 · 영예의 이화인상 수상, 라인댄스 강사로 또 다른 봉사도
■ 춤으로 시작된 새로운 삶

시니어센터 라인댄스 클래스의 학생들과 함께..
2001년, 힘겨운 이민생활 속에서 그는 외로움을 이겨내고 건강과 활력을 얻기 위해 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 5년이 지나자, 그는 럿커스대학 레크리에이션 댄스 프로그램의 강사로 초빙되었고 서머셋 카운티 커뮤니티센터, 에머슨 커뮤니티스쿨 등에서 라인댄스와 볼룸댄스를 지도하며 시니어들의 건강한 삶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거기서 받은 강사비 전액은 다시 비영리단체에 모두 기부했다.
“댄스는 제게 주어진 또 다른 축복이었어요.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단순한 운동 지도를 넘어, 시니어들의 건강과 공동체 참여를 돕는 지역사회의 든든한 힘이 되고 있다.
송 이사장은 평통 여성부회장으로 봉사하며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뉴저지 상록회에서 사회봉사상을, 뉴욕총영사로 부터 감사장을 받았으며, 모교인 이화여고에서는 이화를 빛낸 동문에게 주는 영예스러운 ‘이화인 상(경영부문)’도 받았다.
“저는 늘 바쁘고 활기차게 살았습니다. 자랄 때도 누구보다 쾌활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으니까요."
2남 1녀의 장녀인 탓인지 송 이사장에게는 말투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확실하고 씩씩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이 몸에 배어있는 듯하다.
어릴 때 자란 환경이 지금도 크게 영향을 받아 무엇이든지 했다 하면 적극적으로 나서 확실하게 해치운다.
지금의 라인댄스 강사로 사람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도 자랄 때 몸에 밴 활기참과 적극성에서 나온 것이란다.
송 이사장은 고등학교 재학 때도 다방면에 열심을 다했다. 끼가 많아 연극에도 관심을 보이면서 시간을 쏟았다. 유관순 기념관 무대에도 설만큼 적극적이었다.
“저는 어떤 일이든 닥치면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저의 인생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송 이사장은 지금도 계속해서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있다고 밝힌다.
송 이사장은 끊임없이 쉬지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 하나 이루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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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