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물이 새나, 모래가 새나

2025-10-30 (목) 12:00:00 박연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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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건은 쓰임을 넘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들이 있다. 내겐 필통이 그렇다. 요즈음은 좀처럼 보기 드물지만 글 모임에 가면 몇몇은 가방에서 필통을 꺼낸다. 그중 지퍼 달린 색동 천으로 된 필통이 인상적이다.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있어 주인에게 잘 길들여진 물건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나와 같은 부류로 짐작되어 왠지 말이 더 잘 통할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문구류를 좋아했다. 책상 서랍 속에는 색깔과 모양이 다른 필통이 여러 개 있었다. 숙제를 끝내면 책과 공책을 챙기고 필통에 연필을 가지런히 넣어야 마무리되었다. 당시 처음 나오기 시작했던 잠자리 표 향나무 연필을 도루코 칼로 조심조심 깎았다. 끝이 뾰족하게 깎인 연필을 필통에 가득 넣고 바라보는 시간이 좋았다.

어느 날 친구가 새로 산 자석 필통을 자랑했다. 내가 쓰고 있던 플라스틱필통과는 달랐다. 위아래 자석이 붙어 있어 뚜껑을 열고 닫을 때 찰칵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면서 꼭 맞게 닫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도록 한 자루씩 낄 수 있게 되어있었다.


어떻게 하면 새 필통을 가질 수 있을까 궁리하다 버스비를 모아 살 계획을 세웠다. 학교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걸어서 집에 갔다.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시장통을 지나며 문구점 앞에서 매일 필통을 보는 즐거움이 있어 힘들지 않았다. 밝은 불빛 아래 진열된 알록달록한 필통을 보면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열흘 정도 버스비를 모으니 마침내 내가 점 찍어 놓은 필통을 살 수 있었다. 100원이었다.

엄마에게는 매일 걸어왔다고 할 수 없어 친구가 사 주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쓰고 있던 필통은 뚜껑이 부러졌다는 말도 보탰다. 하지만 친구에게 당장 갖다 주라는 야단이 돌아왔다. 친구에게 받은 것이 아니니 갖다 줄 수도 없고 그보다는 내가 갖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얼른 책상 서랍 속에 넣었다.

그때 엄마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명언을 남겼다. “필통이 물이 새나, 모래가 새나” 필요 없는 물건에 욕심내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사실 그렇기는 하다. 가방에 잘 넣어 다니는 필통에 물이나 모래가 들어올 일이 있겠는가.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때가 있다. 물건을 사려고 집었다가 어디선가 ‘물이 새나, 모래가 새나’ 하는 소리가 들리면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꼭 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시절 엄마의 기준으로 보면 지금 내게 필요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옷이 해져서 못 입는 일은 드물다. 유행이 지나거나 싫증이 날 뿐이다. 명품 가방도 필요 없다. 천 가방이 가볍고 만만해서 좋다. 손에 잘 길들여진 익숙한 것으로 쓰던 것만 쓰게 된다.

요즈음은 필통에 집착하지 않는다. 머리카락 한 올도 무겁게 느껴져 볼펜 한 자루만 가방에 넣어 다닌다. 가볍고 편한 것만 찾다 보니 이제는 운동화를 보면 욕심이 난다. 발 모양이 예쁘지 않아 날렵한 구두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다 발에 꼭 맞는 운동화를 발견하면 자꾸 집어오고 싶다. 욕심을 다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복병이다.

운동화만 보면 달려가는 내 모습을 지금 엄마가 본다면 아마도 ‘물이 새나, 모래가 새나’ 같은 말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신발은 정말 물도 새고, 모래도 샐 수 있으니까. 또 모를 일이다. 발 여럿 달린 ‘지네’냐 하고 한 소리 들을지도.

<박연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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