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요칼럼] 단호박의 온기

2025-12-23 (화) 12:00:00 김영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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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하나를 거두었다. 보통 핼러윈 때 보는 크고 둥근 노란 호박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젊었을 때 입으셨던 진초록 비로도 치마 같은 무늬, 멜론 크기의 아담하고 탐스럽게 생긴 단호박이다. 노랗게 말라서 질긴 호박 줄기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을 탯줄을 자르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잘라 따왔다. 손끝에 전해지는 따뜻하고 묵직한 감촉이 낯설지 않다. 열 달을 기다렸다가 태어난 신생아를 품에 안은 것 처럼,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정성이 고스란히 만져져 어느새 내 마음까지 따스하게 데워진다.

한 개의 호박을 얻기까지 나는 그 옆에서 수없이 눈 맞추며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지난 오월에 지인에게서 호박 모종 세 개를 받아왔다. 모종만 보아선 어떤 호박이 열릴지 몰랐다. 난 은근히 호박전을 부쳐 먹을 수 있는 한국 애호박이 열리기를 기대했다. 서너 개의 파란 잎이 달린 어린 모종을 뒷마당의 과일나무 밑에 정성스럽게 심었다. 모종 두 개는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에 말라 죽었다. 어린 것을 목말라 죽였다는 죄책감에 가슴앓이했다.

하나만 남은 모종을 애지중지 살피는 동안 하루가 다르게 자라서 줄기를 잔디밭까지 지경을 넓이며 뻗어가고, 노란 꽃이 필 때마다 휘파람을 불었다. 호박꽃에 벌새가 날아들고 벌 나비가 친구처럼 찾아왔다. 밤에는 바닷바람에 실려 온 안개비를 마시고, 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어루만져 주었다. 여러 송이의 꽃이 피고 지더니 딱 한 송이에서만 연초록 호박이 맺혔다. 하나만 달린 열매가 떨어질까 봐 마치 외동아이를 키우는 부모 마음으로 잘 자라주길 기도하며 오늘까지 기다렸다.


아침저녁으로 싸늘한 바람이 속살까지 스며드는 늦가을이다. 하지만 호박은 서둘러 익지 않는다. 초록색 단호박일지 노란색 큰 호박일지 궁금했다.‘보름달처럼 크게 자라렴’노래하며 물을 열심히 주었지만, 더 커지지도 않고 색깔도 노랗게 변하지 않는다. 비로소 진초록색을 끝까지 고수하는 단호박은 자기 명함을 밝혔다. 한여름 뙤약볕을 견디고, 가을 서리 내리는 날까지 천천히 당도를 채워간 호박이다. 가끔은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자연의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그 리듬에 순응하며 그 만의 달큼한 속살을 담아낸다. 추위가 다가와도 저항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그 기운을 흡수해 단단해진다. 기다림 속에서 자란 호박은 불필요한 쓴맛은 사라지고 본연의 단맛이 깊어진다. 가을을 기다린 우리의 관계도, 일도, 마음도 더욱 성숙해져서 단호박 맛처럼 달콤하게 익었으면 좋겠다.

잘 익은 호박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소중한 교훈만 준 것이 아니다. 마음까지 따뜻하게 한 호박은 다양한 영양소가 풍부하여 면역력 강화, 항산화 작용, 부기 완화, 혈관 건강 개선,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 단호박으로 어릴 적 어머니가 끓여주셨던 호박죽을 만들어야겠다. 음식 솜씨가 좋으셨던 어머니는 호박죽에 새알과 잣을 넣기도 했고, 팥을 넣기도 했는데, 어머니 사랑의 손맛이 나올는지 모르겠다. 몇 조각을 남겨서 단호박을 스팀에 쪄 먹어도 달고 맛있다. 겨울이면 호박을 크게 잘라 큰 가마솥에 삶아 엿기름가루를 넣어 만들어준 달고 찐득한 호박 조청에 흰떡을 찍어 먹었다. 그 겨울, 그 집의 꽁꽁 얼어붙은 툇마루, 상할머니, 할머니,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달콤한 호박죽 추억을 맛본다. 단호박의 온기를 봄을 기다리며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김영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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