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스를 보면 우리 정치가 일상적인 혼란을 너머 어딘지 단단히 고장이 난 듯 한 느낌을 받는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최근 퓨리서치센터가 28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중간값 58%에 해당하는 성인들이 자국의 민주주의 작동방식에 불만을 표시했다. 미국인의 60%,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거의 10명 중 7명이 이같은 견해에 동의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독재보다 민주주의를 선호하지만 작동방식에 대한 불만과 실망이 광범위하게 퍼진 상태다.
이 문제를 꺼내들면 특정 연령대에 속한 사람들은 종종 1970년대를 떠올린다. 그 당시에도 서구 민주주의는 기운이 다한 듯 보였다. 미국에서는 인플레이션,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로 대중의 신뢰가 무너졌다. 새뮤얼 헌팅턴은 민주주의의 ‘통치 가능성’에 대해 경고했고 대니얼 벨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미덕들을 잠식하고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1980년대에 상황이 반전됐다. 경제개혁과 기술적 역동성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켰다. 그로부터 10년이 채 안돼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유민주주의가 승자로 우뚝 서면서 1970년대의 위기는 쇄신의 서곡이었음이 입증됐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제는 그때와 다르고 더 깊어 보인다. 이전의 위기는 관리의 문제였다. 정부는 제 몫을 하지 못했지만 국민은 여전히 민주주의 체제를 신뢰했다. 연방대법원은 존경받았고, 의회는 제대로 기능했으며, 언론의 권위는 굳건했다. 국민들은 규칙이 시행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규칙을 믿지 않는다.
오늘날 법원, 언론, 대학, 심지어 선거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중앙기관과 핵심 제도는 편향됐다는 견해가 대세를 이룬다. 정부에 대한 신뢰는 20% 수준으로 떨어졌고 의회 지지율은 10%대를 맴돈다. 언론을 신뢰하는 미국인은 전체의 1/3 이하로 1970년대에 기록된 3/4를 크게 밑돈다. 문제는 역량과 능력이 아니라 응집력과 신뢰다.
한때 제도는 존경을 받았다. 중립적인데다 규칙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정치적 행위자로 인식되어 진다.
마이클 루이스는 자신의 팟캐스트 ‘Against the Rules’ 첫 회에서 여느 때처럼 정확히 판정을 하고 있는 심판을 향해 “당신 형편없어!”라고 고함을 지르는 스포츠 팬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문제는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다. 일단 편파적이라고 낙인찍힌 심판은 제아무리 정확한 판정을 해도 좀처럼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 법, 언론과 정치에서도 동일한 상황이 발생한다. 심판이 투명하지 못하거나 불신을 받으면 경기 전체가 부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루이스의 주장은 책임성 하나만으로는 민주주의를 고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투명성이 높아지면 편견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고 냉소주의를 치료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킬 수 있다.
이것이 도널드 트럼프의 독특한 매력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중립적인 척하는 태도를 완전히 버렸다. 그의 행동은 개인적이고, 정치적이며 심지어 징벌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 솔직함이 지지자들의 경계심을 풀게 만든다. 모든 제도가 편향되었다면 중립을 가장하는 위선자보다 차라리 노골적인 당파주의자가 더 정직하게 느껴진다.
김성인과 피터 A. 홀의 2023년도 연구는 이런 패턴을 확인해준다. 제도가 불공정하거나 편파적이라고 인식한 시민들은 중립적 절차보다는 개인화된 통치를 선호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자신을 심판이 아닌 투사로 내세우며 법원, 언론과 관료제를 공격하는 지도자들은 제도의 공정성이라는 허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신뢰를 얻는다.
트럼프의 부상은 또한 좌파와 우파 포퓰리즘 사이의 더 깊은 분열을 드러낸다. 김성인과 홀에 따르면 불공정을 내 일자리와 소득, 나의 미래와 연결지어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할 때 사람들은 우익 포퓰리스트쪽으로 돌아선다.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이들의 고통은 엘리트와 외부세력의 배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불공정을 사회가 타인을 불공정하게 대한다는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재분배를 약속하는 좌파 포퓰리스트들에게로 다가선다.
최근 몇 년 간, 탈산업화, 자동화, 인구이동, 세속화 등 사람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든 충격은 사회적 불공정보다 개인적 불공정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노동자들은 단지 타인이 가난하다는 것보다 자신이 대체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분노를 낳고,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과 보호주의, 국경통제, 국가 재건을 주장하는 우파의 서사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좌파 포퓰리스트는 연대를 호소하지만 우파 포퓰리스트는 복수를 약속한다. 불안한 사회에서는 좌파의 서사가 더 진한 호소력을 갖는다. 여기에 관료제부터 언론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핵심 제도를 실추시키려는 우파의 수 십년에 걸친 캠페인이 더해지면서 우파 포퓰리스트의 의도대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1970년대의 위기는 민주주의가 실질적인 성과를 내도록 지도자들이 앞장서면서 끝났다. 당시 사람들은 정부의 역량을 의심했지만 정당성 자체를 의심하진 않았다. 오늘날의 도전은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문제다. 제도는 여전히 작동하지만 공정성의 후광을 잃었다. 시민들이 더 이상 심판을 신뢰하지 않으면 규칙을 따르지 않게 된다. 모든 선거는 다른 방식의 내전처럼 느껴지고, 진실마저도 부족 중심의 것이 된다.
우리는 이제 민주주의의 포스트-심판 시대에 들어섰다: 제도는 믿기 어렵고, 공정성이 조롱을 당하며, 시민들은 정책이 아닌 정체성에 따라 편을 가른다. 70년대의 위기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고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회복됐다. 지금 우리의 위기가 끝나려면 시민들 사이에서 민주주의는 다시 믿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나와야 한다.
50년전, 사람들은 정부를 의심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한다. 다음 민주주의의 회복은 유능한 관리자나 기술적 개혁에서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인 신뢰의 재발견에서 올 것이다. 심판이 공정을 기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향해 “심판, 너 정말 형편없어”라고 계속 외쳐댈 것이다. 그리곤 왜 이 경기가 더 이상 할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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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 CNN ‘GPS’ 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