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특파원 시선] ‘통합’ 대신 “싸우자”…대통령 트럼프의 언어

2025-09-27 (토) 0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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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임 첫날 ‘하나의 국가’ 말했지만…최근 ‘좌파와의 전쟁’ 선포

▶ 커크 암살에 ICE 총격까지…진영갈등 깊어지며 극단적 폭력행위 늘어

[특파원 시선] ‘통합’ 대신 “싸우자”…대통령 트럼프의 언어

찰리 커크 추모식 참석한 트럼프 [로이터]

"내 좌우명은 항상 되갚아주라는 것(get even)이다. 누군가 당신을 괴롭힌다면, 몇 배로 되갚아줘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07년 자신의 저서 '크게 생각하고 사업과 인생에서 성공하라' 중 '복수'라는 챕터에서 밝혔던 내용이다.

요즘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사업가 시절 자신의 좌우명을 국내 정치에 그대로 적용하는듯한 모습이다.


지난 21일 애리조나주 스타디움에서 열린 청년 보수 활동가 고(故) 찰리 커크의 추모식에는 우파 진영 핵심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통합과 치유를 말하기보다는, 우파와 좌파를 선악 구도로 나누고 좌파 진영을 적으로 규정하며 '좌파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자리였다.

정점은 커크의 배우자 에리카에 이어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커크)는 자기 적들을 증오하지 않았다. 상대를 위한 최선을 바랐다. 이 지점이 내가 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다. 나는 내 적을 증오한다. 나는 그들을 위한 최선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폭력은 대개 좌파 쪽에서 나온다"며 커크의 암살 배경에 급진 좌파 세력의 폭력 조장 행위가 있다고 비판한 뒤 자신의 대선 구호였던 "싸우자(fight)"를 반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 자신의 다짐을 현실화하기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반(反)파시즘 좌파 운동인 '안티파'(Antifa)를 국내 테러 단체로 지정하고, 정치 폭력 선동 조직 등을 수사하기 위한 '국가 합동 테러 태스크포스' 구성을 연방수사국(FBI)에 지시했다.


지난 24일 텍사스주 댈러스의 이민세관단속국(ICE) 건물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을 두고도 트럼프 대통령은 "급진 좌파 민주당 당원이 끊임없이 법 집행 기관을 악마화하고 ICE 폐쇄를 요구하고 ICE 요원을 나치에 비유한 결과"라고 말했다.

당시 총격범이 소지했던 탄환의 탄피에 ICE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은 '안티 ICE'가 적혀 있었던 것과 연결지어 좌파 진영을 거듭 정조준한 것이다.

정적(政敵)들을 겨냥한 정치 보복도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최근 의회에서의 허위 진술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은 2016년 미 대선 당시 트럼프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의혹 수사를 맡았다가 트럼프와 오랜 갈등을 빚어온 인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미 전 국장이 기소된 뒤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를 "더러운 경찰(Dirty Cop)"이라고 맹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복수가 아닌 정의"라며 기소의 정당성을 강조했지만, 이번 기소는 트럼프가 법무부에 압력을 가한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되갚아줘야 한다'는 트럼프의 좌우명이 적용되는 대상에 언론사도 예외는 아니다.

ABC방송의 '지미 키멀 라이브쇼'는 진행자 키멀의 찰리 커크 관련 발언으로 중단됐다가 최근 재개됐다.

미국 방송통신분야 규제당국인 연방통신위원회(FCC) 브렌던 카 위원장이 방송 면허 취소를 거론하며 압박에 나선 것이 쇼 중단의 직접적인 이유로 거론됐다.

키멀은 커크 살해범과 관련해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핵심 지지층을 의미) 일당이 커크를 살해한 녀석이 자기 중 하나는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선을 긋고 있다"고 말했다가 보수 진영의 거센 반발을 샀다.

트럼프 대통령은 키멀의 라이브쇼 재개를 두고 "왜 그렇게 형편없고 재밌지도 않고, 99% 민주당 지지하는 쓰레기로서 방송사를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을 데려오려 하나"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번 일로 우리는 ABC를 시험해볼 생각이다. 저번에는 그들이 나에게 1천600만달러를 냈는데 이번 건은 더 수익이 높을 것 같다"며 소송을 예고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연일 '분열'의 언어를 쏟아내는 트럼프 대통령도 취임 초반엔 국민 통합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 것 같다.

지난 1월 20일 취임사에서는 "우리는 신 아래서 하나의 민족, 한 가족, 하나의 영광스러운 국가"라며 '통합'의 메시지를 냈다.

트럼프의 대선 경쟁자였던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의 최근 저서 '107일'에 따르면, 대선 이튿날 통화에서 해리스 전 부통령이 "모든 미국인을 위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자 트럼프 당시 대통령 당선인은 "나는 친절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일 것"이라고 화답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실제 행보는 '국민 통합'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미국 사회에서 진영 갈등이 깊어지고 극단적 폭력 행위가 늘어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과 측근들이 반대 진영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출하면서 이 같은 분열상에 기름을 붓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부분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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