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황당한 제목이다. 자기가 피카소의 할애비라니? 이런저런 신간 서적들 틈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표지와 제목이 있어 집어 들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현대미술의 권위 그 자체인 피카소를 감히 자기 손자라며 내가 그의 할애비라고 자처하는 도발적이고 역설적인 그 당당함은 허세일까, 뻔뻔함일까? 잠시 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허풍스럽고 그러나 기막히게 자유로운 선언 같기도 했다. 독자들에게 황당함을 주는 제목이다. 일단은 한번 보자며 책을 사려했는데, 그건 누가 이미 맡아논 책이라고 해서 주문만 하고 돌아왔다. 1,2 주가 걸린다고.
지난 7월 29일 한국일보 H 매거진 최영준의 인생만평 란에 ‘남김’이라는 짧은 시와 수묵화가 눈에 들어왔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둥지 두 개/ 당신을 위해 남겨두었어요/ 춥고 외로울 때/ 삶에 지쳐 힘들 때/ 언제든지 찾아와 편히 쉬세요.”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큰 나무에 검은 둥지 두 개가 눈에 띄는 수묵화였다.
나는 화선지 위에 붓으로 그 짤막한 시를 옮겨 썼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둥지 두 개…….’ 글씨는 따뜻함과 위로가 묻어나는 먹물 캘리그래피로. 사진을 찍고 그걸 신문에 있는 이메일 주소로 보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냥 좋은 시를 쓴 작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으로 보냈다. 그런데 의외로 정말 의외로 바로 이메일 답장이 왔다. 자기는 지금 미국 공연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그리고 참 고맙다고. 세상에! 난 정말 답신이 올 거라는 기대는 눈곱 만큼도 없이 그저 허공에 꽃잎을 날리는 마음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저 좋은 시를 쓴 사람에게 보내고 그걸 좋아해 주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는 내게 자기의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 이수일과 심순애, 그리고 세종대왕, 이순신 등 직접 제작한 단편영화들을 보내주었다.
다음 날, 책방에서 전화가 왔다. 주문한 책이 왔다고. 나는 ‘세상에’ ‘세상에’를 연발하며 주문한 책을 사 갖고 왔다. ‘내가 피카소의 할애비다’의 저자가 바로 그 사람인 것이었다. 한국일보에 실린‘남김’이라는 시를 내가 붓글씨로 썼고 그게 이메일로 전달이 되어 글과 글씨의 만남이 이루어 진. 그런데 실은 내가 그 시를 알기 전에 이미 그 시가 실린 책에 관심을 갖고 주문을 했다는 사실이 또 재미있다. 이런 인연이 있는 사람의 책이 내가 사려고 주문하고 기다렸던 책이라는 게 믿기어지지 않는다.
그는 현재 ‘최영준 유랑극단’을 운영하며 ‘21세기 무성영화 변사’로 활약하고 있다.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을 작사, 작곡하고 노래도 했다. 지난 30년 동안 20회 이상이나 미주에서 순회공연을 했단다. 신파영화 ‘홍도야 우지마라’로 감독으로 데뷔했고 이 시대의 마지막 변사로 열정을 쏟고 있다. 1인 36인 역으로 목소리를 바꾸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다. 코메디안으로 영화제작자로 시인으로 화가로, 모든 예술 장르의 벽을 허물고 종횡무진, 무지하게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카소라는 이름 앞에서 움츠러든다. 예술의 거장으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별과 같은 존재 피카소의 권위를 한순간에 깨뜨리며 ‘피카소? 그 친구, 내 손자 쯤 되지’라는 태도로 어쩐지 허풍스럽고 황당하면서도 통쾌하다. 웃음이 난다. 천재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마음만 먹으면 피카소의 할애비쯤은 될 수 있다는 유쾌한 도발이다.
나는 이 제목을 오래 곱씹어본다. 웃음 뒤에 남는 자기 확신은 세상의 위계와 권위를 가볍게 뛰어 넘는 용기가 된다. 자유로운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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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김 서예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