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제 스토리] 불모지에서 15년간 한국어 교육… “뿌리교육 소명”

2025-09-18 (목) 12:00:00 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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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렌시아 한국어학교’ 홍연숙 교장·김정우 목사
▶ 언어학 박사 모친과 공학박사 출신 목회자 아들

▶ 한인 차세대 양성 위한 특별한 지역사회 섬김
▶ “정체성·자부심 심어주고 정신건강 돌봄까지”

[화제 스토리] 불모지에서 15년간 한국어 교육… “뿌리교육 소명”

‘발렌시아 한국어학교’의 홍연숙 교장(왼쪽)과 설립자 김정우 목사는 모자지간이다. 지난 15년 동안 지역사회에 한국어 교육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헌신해 왔다. [노세희 기자]

LA 북쪽 신도시 발렌시아. 한인 인구가 본격적으로 늘던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이곳은 한국어 교육의 불모지였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도 정규 한국어반이 개설된 학교가 없었고, 한 한인교회 부설 주말 한국학교마저 문을 닫자 2세 청소년들은 모국어와 점점 멀어졌다. 그때 지역사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은 목회자와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USC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특허 변호사의 길을 준비하던 김정우 목사(64). 그러나 그는 소명을 따라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고, 2006년 발렌시아 새누리교회를 개척했다. 목회와 더불어 한인사회를 섬길 방법을 찾던 그는 2010년 교회당에서 작은 책상 몇 개를 놓고 ‘발렌시아 한국어학교(Valencia Korean School)’의 문을 열었다. 첫 학생은 다름 아닌 그의 두 아들이었다.

이 학교의 든든한 뿌리에는 그의 어머니 홍연숙(88) 교수가 있다. 아이비리그인 펜실베니아대(유펜)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1980년대 중반 UC 버클리 교환교수 시절 한국어반 개설을 주도해 미국 대학에 한국어 교육을 확산시킨 인물이다.
[화제 스토리] 불모지에서 15년간 한국어 교육… “뿌리교육 소명”

지난 2022년 발렌시아 한국어학교 개강식 모습. [학교 제공]


정년 퇴임 후에도 연변과학기술대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가르치고, 멕시코 티화나 UABC대학에 한국어 과정을 개설해 현지 청년과 한인 후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 공로로 2017년에는 LA 총영사관 추천으로 교육부총리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홍 교수는 상보다 현장의 열매에 더 마음을 두었다. 아들의 요청에 기꺼이 응해 발렌시아 한국어학교 초대 교장을 맡은 것도 “한국어 교육은 곧 뿌리교육”이라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5년. 지금까지 약 1,000명의 학생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다. 현재 발렌시아 한국어학교는 리스토레이션 교회(23670 Wiley Canyon Rd.)에서 기초반,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등 수준별 맞춤 교육을 운영 중이다.

매주 금요일 오후 열리는 수업에는 5세 유아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모인다. 한 반 10명 내외의 소규모 수업으로 운영되며, 말하기·듣기·쓰기뿐 아니라 사물놀이, 한복 만들기, 전통음식 체험 등 다채로운 문화활동을 통해 학생들은 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홍 교장은 “어릴 때는 한국말을 곧잘 하다가도 학교에 가면 금세 잊고, 중·고등학생이 되면 아예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며 “대학에 가서야 뿌리를 찾고 싶어 하지만, 그땐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학부모들에게도 “부모가 영어를 잘하더라도 자녀와는 한국어로 대화하라”고 당부한다.

설립자 김정우 목사는 목회와 더불어 상담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한인 이민자들의 정신건강 돌봄에도 힘쓰고 있다. 그는 패사디나의 비영리 상담센터(LA VIE Counselling Center)에서 주 2회 상담을 진행했다.

최근에는 유스타 파운데이션이 주최한 우울증·치매 예방 세미나에서 상담 부스를 운영하며 지역사회와 이웃을 섬겼다. 목회와 교육, 상담을 아우르는 그의 사역은 모두 “더 좋은 소명을 따라가겠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됐다.

이 모자의 마지막 꿈은 발렌시아에 ‘크리스천 스쿨’을 세우는 것이다. 한국어와 신앙 교육을 바탕으로 미래 세대를 키워내고, 지역 청소년들에게 언어와 뿌리, 믿음을 동시에 심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작은 교회에서 시작된 씨앗은 15년 동안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이제는 지역사회를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발렌시아 한국어학교의 이야기는 단지 한 학교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어떻게 뿌리를 지키고 세대와 문화를 이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감동이다.

문의 (661)505-3234, yshong333@yahoo.com

<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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