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한 뼘 더 길게 늘어난 하늘, 거침없는 황금빛 햇살이 지구위에 쏟아지고 있는 여름날이다. 더위가 길게 하품하며 하루의 시간을 부채질 하고 있다.
그동안 세월은 많이 흘렀다. 주위의 사랑하는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셨다.
올해 들어 “한얼모임”의 오랜 맴버였던 2분이 가셨다. 우리는 지난 38년 동안 “삶과 철학과 문학과 과학”을 생활과 공유하며, 호흡하며, 일상의 곳곳에 뿌리 내려 더불어 살아왔다. 이젠 예전의 영광과 열정은 식었지만, 남아있는 회원들끼리 마음을 합해 계속 매월에 한 번씩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지구촌의 우리는 예기치 않았던 팬데믹기간을 겪었으며, 또 세계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근래 들어 참담한 기후위기를 겪고 있는데다, 상상의 현실적 날개를 단 인공지능의 부강 등 우리는 끈임 없는 예측불가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예측불가능 속에서 우리는 보이는 것만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는 모르는 채 유한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 분야의 미래에 관해 최고 권위자인 커즈와일은 2045년에는 인공지능이 출현해 인간과 결합하는 ‘사이버그 시대’가 올 것이라 한다. “2029년께 인간의 뇌와 성능이 다름없는 기계지능이 나타날 것이다. 그 이후 기계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해?2045년에는인간 지능을 수십억 배 능가하게 된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인간의 역사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고 했다. 지금은 그런 상상의 삶이 불가능으로 느껴지지만, 지난 모더니즘이후 1세기동안 지구촌의 변화와 발달로 유추한다면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떤 삶을 살던 그 주인은 나 자신이다”고 사르뜨르는 말했다. 실존이라는 말은 다른 세상의 말같이, 피부 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사실은 우리의 매일 일상의 삶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기에 삶은 그 자체로 살아야할 이유이다.
삶과 죽음사이를 우리는 매일 건넌다. 카뮈의 ‘이방인’의 메르소처럼 세상의 소음과 등지고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살기도 한다.
카뮈는 삶은 “부조리” 라고 그의 소설 “이방인”에서 말했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벗어나 “진짜 나로 살아라. 그게 비록 외롭더라도” 그러나 그는 “부조리를 껴안고도 우리는 살아야한다.”고도했다.
감정이 마모된 인간, 아무리 큰 일이 일어나도 그저 한줄 뉴스거리에 불과한 소비되는 삶, 오늘의 우리는 삶의 진실과 등지고 살고 있진 않을까.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그 선택으로 자기를 만들어간다. 즉,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 뒤에 스스로를 만들어 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이버시대인 오늘에는 이성의 역사적 시효는 가고, 지식의 약효는 ChatGPT에 저당 잡히고, 생의 의미와 가치는, 경제의 기본 단위인 돈이 ‘글로벌리즘’의 날개를 달고 우주를 날아다니며 현대인들에게 환상적인 만화경을 굴리고 있는 현실이다.
다음 우리들의 작은 모임에선, 현실의 우리의 적나라한 생활에 대해 토론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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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