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美정가 뒤흔든 엡스타인 파일…정작 성착취 피해자 고통은 뒷전

2025-07-19 (토) 09:3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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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들, 자료 비공개에 반발… “리스트 있다더니 말 바꿔…뭔가 숨기는 듯”

▶ 법무부, 맨해튼 법원에 엡스타인 사건 대배심 증언 공개 요청

美정가 뒤흔든 엡스타인 파일…정작 성착취 피해자 고통은 뒷전

제프리 엡스타인 [로이터]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세상에 알리려고 했던 모든 노력이 지금 지워지고 있는 것 같다."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체포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제프리 엡스타인에 대한 수사 문건, 이른바 '엡스타인 파일'로 미 정가가 들끓고 있는 가운데, 정작 사건 피해자들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NBC 방송은 19일 엡스타인 사건 피해자들의 고통이 정치적 공방 속에 간과되고 있다고 피해 여성들을 인터뷰해 보도했다.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의 억만장자 엡스타인은 자신의 자택과 별장 등에서 미성년자 수십 명을 비롯해 여성 다수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는 성범죄 혐의로 체포된 뒤 2019년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엡스타인으로부터 성접대를 받은 정관계 유력 인사들의 리스트가 존재한다거나, 그의 사인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등의 음모론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엡스타인 사망 배후에 '딥스테이트'(Deep State·막후 권력자들)가 있다고 주장하며 지지자들을 결집했으나, 재집권 뒤에는 정보 공개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열성 지지층 마가(MAGA)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엡스타인의 성폭력 피해자라고 밝힌 대니엘 벤스키(38)는 "치유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로, 우리가 지워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용기를 내 나섰던 여성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기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이 다 지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벤스키는 최근 법무부가 엡스타인의 '성 접대 리스트'가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힌 데 대해 "슬픔이 몰려왔다"며 "정의를 찾으려 했던 모든 시간이 부인당한 것 같다. 마치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토로했다.

2000년대 초반 엡스타인의 마사지사로 고용됐다가 성폭력을 당한 테레사 헬름은 "트라우마는 치유되는 데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며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고, 권력자들이 마침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는데 그 문이 닫혀 버리고 오랫동안 열리지 않는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건가"라고 말했다.

엡스타인의 피해자로 유명한 고(故) 버지니아 주프레의 변호사인 데이비드 보이스도 트럼프 정부가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하지 않은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엡스타인의 고객 리스트를 공개할 것처럼 하다가, 갑자기 180도 태도를 바꿔서 아무것도 공개하지 않으면서 일을 크게 만들었다. 일관되지 않은 태도가 기름을 부은 셈"이라며 자료 공개를 촉구했다.

배우 지망생이었던 1997년 엡스타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알리시아 아든은 "팸 본디 법무장관은 지난 2월에 (성 접대) 리스트가 있다고 했다가, 이제는 리스트가 없다고 한다"며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아마 리스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내용이 담긴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법무부는 엡스타인의 기소 과정에서 나온 대배심 증언을 공개해달라고 맨해튼 연방법원에 요청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본디 법무장관에게 대배심 증언 내용 중 의미 있는 것은 법원 승인을 받아 전부 공개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이는 엡스타인 관련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지지자들의 비판 여론을 잠재우고 더 이상의 음모론 확대를 막으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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