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인 칼럼] 반지성주의야, 물러가라

2025-07-16 (수) 01: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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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식 목사/ 밀피타스 세화교회

1925년 7월, 미국 테네시주 데이턴(‌Dayton)에서 한 재판이 열렸다. 일명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Scopes Monkey Trial). 당시 테네시주는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버틀러 법’(Butler Act)을 통과시켰다. 이에 반발한 한 젊은 생물 교사, 존 스콥스(John Scopes)는 일부러 고등학생들에게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치고, 의도적으로 기소당했다. 이것은 ‘과학의 자유 vs. 종교적 검열’을 놓고 벌어진 상징적 퍼포먼스 재판이었고, 미국시민자유연합(ACLU)의 후원을 받으며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양측 변호인도 당시 최고의 인물들이었다. 기소 측은 세 번이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었다. 그는 신실한 기독교 근본주의자였고, 성경적 창조론을 앞세워 진화론을 강력히 반대했다. 반면 변호인으로 나선 클래런스 대로우(Clarence Darrow)는 당대 최고의 형사 변호사이자 진보 지식인이었다. 그는 조세 개혁과 토지 공개념을 주장한 ‘조지스트’(Georgist)였고, 자유주의와 인권의 대변자였다.

재판의 백미는 대로우가 브라이언을 증인석에 세운 장면이다. 대로우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를 조목조목 짚어 나간다. “브라이언 씨, 요나가 고래 뱃속에 삼일 있었다는 이야기를 믿습니까?” “네,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 그대로 믿습니다.” “지구가 6천 년 되었다고 보십니까?” “네, 그렇게 계산됩니다.”


이 장면은 라디오로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많은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가 이성을 거부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 결과 ‘기독교 = 반지성주의’라는 이미지가 사회에 깊이 각인되었다. 역사학자 마크 놀(Mark A. Noll)은 그의 고전 『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 1994)』에서 이 현상을 복음주의 신앙의 치명적 약점으로 지적한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란, 비판적 사고를 경시하고, 학문적 탐구나 이성적 토론을 기피하며, 복잡한 현실에 대한 단순한 해석을 고집하는 태도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교회의 쇠퇴와 직결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신뢰를 잃고 있는 이유는 다양하다. 세속화, 과학기술의 발달, 폐쇄적 문화, 권위주의, 도덕적 실패, 정치적 편향, 혐오의 언어, 공동체의 약화, 진리 독점성 등. 이 모든 요소의 이면에는 ‘반지성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교회가 여전히 자기 안에만 갇혀 있을 때, 사람들은 교회를 시대착오적인 곳으로 느낀다. 과학의 발전 앞에서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신앙은 설득력을 잃는다. 비판을 ‘불순’이라 여기고, 토론 없는 일방적 권위를 유지할 때, 신앙은 더 이상 지적 삶의 동반자가 되지 못한다. 성 스캔들과 재정 비리 같은 도덕적 실패 역시 반지성주의의 결과다. 고백과 성찰 대신 감추고 방어하는 구조가 문제를 더 깊게 만든다. 여기에 정치적 편향이 더해져 교회가 복음이 아니라 특정 이념의 도구가 될 때, 신앙은 빛을 잃는다. 다양한 세계관이 공존하는 이 시대에, “오직 우리만이 진리를 안다”는 식의 태도는 자칫 오만하게 읽힌다. 교회는 더 이상 타자와 대화하지 않고, 사랑과 환대보다는 정죄의 언어를 더 가까이 두고 있다.

이렇게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교회는 더 이상 사람들의 삶과 연결되지 못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앙은 성찰과 질문, 해석과 응답 속에서 자라온 전통이다.

신앙은 이성과 긴밀히 동행하고,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탐구의 여정이다. 교회는 다시, 묻고 토론하고 사유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쳐야 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으로. 반지성주의야, 물러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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