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요단상] 석모도의 꿈

2025-06-20 (금) 12:00:00 전병두 서북미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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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강화도 서편에는 석모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강화도 외포항에서 서쪽으로 1.2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다. 강화도와 함께 석모도는 19세기 말부터 서구 문명을 접촉한 곳이기도 하다.

유자경 씨가 태어난 곳은 석모도였다. 유자경 씨는 7남매의 장녀로 동생들을 보살피며 섬에서 성장하였다. 넓은 세상에 나가 꿈을 펼치고 싶어 했던 그는 연세대에서 생화학을 전공하고 1986년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6년 동안 분자 생물학 연구를 통하여 와이오밍 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그의 꿈은 멈추지 않았다. 같은 학과 박사 과정의 학생과 긴 우정을 쌓은 끝에 마침내 가정을 이루었다.

2001년 유자경 박사 부부는 오리건주 유진에 소재한 화학회사에 취직하여 연구하고 싶었던 인간 유전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의 유전자 수가 약 2만~2만5천 개 정도임이 밝혀졌고 이를 바탕으로 유전적 질환의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큰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의미 깊은 프로젝트였다.


늦게 얻은 외동딸 안젤라는 이민 생활의 외로움을 품어주는 보석이었다. 한글도 가르치고 한국 교민들과 자주 만남을 통해서 모국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했다. 유박사는 가족과 함께 석모도를 방문하여 어린 시절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안젤라도 엄마처럼 꿈을 간직하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안젤라도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대학 진학 때 어머니와 같이 생화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어머니의 꿈이 딸에게로 이어졌다. 캘리포니아 대학(UCLA)의 박사과정에 입학한 딸이 학교 기숙사로 떠나던 날 자경 씨 부부는 딸의 큰 가방을 차에 싣고 함께 학교로 향했다. 어머니는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던 37년 전의 자기 모습을 연상하였다.

유자경 박사가 몸에 이상을 느낀 것은 딸이 입학한 가을을 지난 이듬해 봄이었다. 연구에 대한 열정이 식고 오후가 되면 피곤으로 쓰러지곤 했다. 입맛이 사라졌다. 정밀 검사 결과는 경부암이었다. 이미 꽤 진행된 상태였고 담당 의사의 얼굴은 어두웠다. 키모 치료도 몇차례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새로 개발된 약을 집중 투입을 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담당 의사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평안히 쉬시고 마음으로 준비하시면 좋겠습니다…” 유박사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꿈을 향해 달려왔던 지난 세월이 후회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꿈을 접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안젤라가 달려왔다.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대머리가 된 엄마의 머리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엄마도 아가를 품에 안듯이 안젤라를 안았다. 엄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안젤라, 엄마는 안젤라가 있어서 행복해. 엄마가 키워 오던 꿈을 네가 계속해서 키워 주렴...” 잠시 후 유박사는 눈을 감았다.

어릴 때 유난히 누나를 따랐던 안젤라의 외삼촌은 누나의 유골함을 안고 석모도 가족 묘지를 찾아갔다.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던 섬 소녀가 활짝 웃으며 달려 올 것만 같았다. 파도 소리와 함께.

<전병두 서북미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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