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셔에서] 양심의 무게와 정의의 얼굴
2025-06-19 (목) 12:00:00
성민희 소설ㆍ수필가
냉장고 문을 여니 돼지족발 덩어리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저께부터 오늘까지 무려 사흘간이나 나를 괴롭히고 있는 ‘oo 원조왕족발’이다.”
초대한 손님 상차림을 위해 마켓에 갔다. 이런저런 재료를 카트에 담다가 돼지족발을 보자 군침이 돌았다. 저것도. 하며 세 개를 담았는데. 계산대 앞에 서자 마음이 바뀌었다. ‘차라리 식당에 오더해서 따끈한 걸로 할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이건 안 살래요. 아가씨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족발을 거칠게 카운터 옆으로 밀쳐냈다. 나는 그저 죄지은 사람이 되어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계산을 마쳤다. 집에 와서 물건을 덜어내는데 돼지족발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분명히 모두 안 산다고 했는데. 영수증을 훑어보니 족발값은 계산되지 않았다. 아가씨가 밀어낼 때 이게 빠진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고민은 시작되었다. 이걸 도로 갖다주어야 하나 모른척하고 먹어야 하나.
아이들 키울 때의 일이 생각났다. 백화점에서 옷을 몇 벌 사고 집에 와서 보니 티셔츠 하나가 더 들어있었다. 깜짝 놀란 딸이 옷을 펼쳐 들고 무슨 큰 사건이라도 난 양 어쩌지? 를 연발하는데 나의 머리는 재빨리 가동되었다. ‘옳지. 정직성을 가르칠 좋은 기회야.’ 우리는 다시 백화점으로 갔다. 계산되지 않은 물건이 딸려 왔기에 다시 왔어요. 집이 좀 멀긴 하지만... 돈을 돌려주는 엄마의 모습은 애들의 마음속에 오래오래 기억될 거야.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가게가 저만치 보이자 아이들은 옷을 마구 흔들며 뛰어갔다. 뭔지는 모르지만 자기들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어떤 섭리였을까. 가게 문 앞에서 옷값을 계산해 준 그 청년과 딱 마주쳤다. 꼬마들이 서로 질세라 설명을 해대자 그는 당황했다. 가게에 취직된 지 며칠 되지 않은 터라 실수한 모양이라며 난처해했다. 내 머리는 또다시 빠르게 돌아갔다. 이 상황이 어쩌면 실직으로 이어질지도 몰라. 나는 얼른 두 팔을 벌려 아이들을 몰고 나왔다.
돼지족발 때문에 심란하던 중 문득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생각났다. 우리는 삶에서 행하는 선한 행동이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할 때가 있다. 때로 양심과 배려 사이, 도덕적 책임과 현실적 결과 사이에서 갈등할 때도 있다. 나의 이 고민에 공리주의자 벤담이라면 “네 알량한 양심 운운 때문에 종업원이 해고될 수도 있는데. 그들의 고통은 어쩔 건가?”하고 묻지 않을까. 반면 동기중심주의자 칸트는 단호하게 “물건값은 치르지 않았어. 그들이야 어떻든 너는 양심을 지켜야 해.”하며 다그칠 거다. 샌델은 말했다. ‘정의’라는 것은 추상적인 원칙, 즉 법적이거나 제도적인 문제나 거창한 정치와 철학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맥락과 공동체의 가치나 역사적 정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도덕적 판단이란 결국 ‘공동선(善)을 함께 고민하는 행위’라고 본 것이다. 그는 묻는다. “민희야, 너가 말하는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이니?”
우유부단에 결정장애까지 있는 나는 세 사람의 말이 모두 맞는 것 같아, 오늘도 시커먼 돼지족발을 앞에 두고 양심의 무게와 정의의 얼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느라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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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희 소설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