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봄 테너 서병선 독창회가 링컨센터 앨리스털리 홀에서 열렸다. 동포사회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미성을 가진 성악가였다. 그의 음악회 소식을 듣고 미리 표를 구입했다. 일찍 일을 마치고 맨하탄으로 차를 몰았다.
노래가 시작되자 그의 깨끗하고 맑은 소리가 홀 전체를 울렸다. 곡이 끝날 때마다 청중들은 박수로 환호했다. 연주곡목에는 내가 들어 본 적이 없는 곡들이 많았다. 비록 곡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천상의 소리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가곡 조두남 작곡 ‘그리움’을 부를 때 나도 모르게 내 살던 고향 흐르는 시냇가, 웃고 지내던 어릴 적 친구들이 생각났다. 호흡이 실린 아름다운 소리는 깊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음악회가 끝나자 콘서트 홀이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와 함께 “부라보” “앙코르”를 여기저기서 외쳐댄다. 몇몇 청중들은 무대 앞쪽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이 날의 주인공을 만나보고 싶어 무대 뒤쪽으로 가보았다. 한참 기다렸다가 서병선 선생님을 만났다. “감명 깊게 잘 들었습니다.” 인사를 하자 밝은 목소리로 “반갑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첫 만남의 인사가 이루어졌다.
음악회를 다녀 온 후부터 나는 서 선생님의 팬이 되었고, 가곡은 내 마음의 노래로 남게 되었다. 서병선 선생님이 불렀던 ‘그리움’을 나도 모르게 부르는 습관이 생겼다.
가곡 속에는 떠나온 조국이 있고, 그리움이 있었다. 먼 옛날 교복을 입고 다니던 학창 시절 음악 시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노래 제목만 들어도 그리움과 향수가 밀려온다. 그래서 인지 가곡은 어려운 이민 생활에 위안이 되었다.
근데 내가 부르는 가곡은 한국인의 소박한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취미로 잘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서 선생님께 레슨을 받기로 했다. 30년 전 서늘한 가을, 서 선생님 집으로 찾아갔다. 맨하탄 업타운에 있는 아파트였다. 낮에도 도둑들이 종종 문을 따고 들어오는 사고가 빈번한 곳이다.
대부분 예술가들의 삶이 가난했듯이 서 선생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낡은 피아노와 공연 사진만이 그가 소박한 음악가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 레슨을 받으러 가서 “가곡을 배우러 왔습니다” 인사를 드리자 대단히 기뻐하셨다. 한 시간 수업을 받기로 했는데 15분이나 더 지날만큼 시간 가는줄 모르고 열성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첫 성악 레슨을 받은 일년 후에 서 병선 가곡교실이 뉴저지에 생겼다. 나와 같이 가곡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였다. 이민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한국 가곡은 나와 함께 했다.
첫 가곡음악회가 Fort Lee Historic Park에서 열렸다. 모두가 서 선생님으로부터 가곡을 배운 비전공 성악가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서 선생님의 가곡교실은 2016년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연로하셨고 가곡을 부르는 사람들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무실 옆에 문화공간을 만들어 피아노를 들여놓았다.
가곡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지도할 선생님을 초대했다. 사라진 가곡교실을 부활시켰다. 열성적인 그들과 함께 예술가곡회를 만들어 한국인의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했다. 음악회도 20회 넘게 했다.
6월 8일에는 22회 한국가곡 음악회를 갖는다. 이 음악회에 서병선 선생님을 초청하기로 했다. 1979년 뉴욕데일리뉴스는 그를 “아시아에서 온 천재 성악가( Brilliant tenor from Asia)”라 하였고, “눈을 감고 그의 노래를 들으면 Joseph Schmitt가 살아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고 평 하였다.
이제 전설이 된 그 분 앞에서 한국가곡을 부른다. 가슴이 뛴다. 비전공 8명의 제자들이 26곡을 부른다. 노래가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다. 이번 음악회는 특별한 날이 될 것으로 가슴이 설레고 또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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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뉴저지예술가곡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