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춘추]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 발자취

2025-06-06 (금) 12:00:00 양상훈 수필가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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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국 방문길에 성군 이순신의 백의종군의 답사를 위해 전남 북동부에 위치한 구례읍에 도착했다. 지리산과 백운사 사이에 옛 선열이 서려있는 고유의 전통문화와 예술의 고장에 여장을 풀면서 설렘과 경건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안개구름 덮인 지리산 준봉 노고단에서 내려가 화엄사 기슭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양반마을 ‘오미행복마을’이란 ‘운조루’에서 하룻밤 민박을 하게 되었다. 마루 뒤편으로 생태 숲 산책로가 조성되어 지리산 둘레 길과 백의종군 탐방객들로 발길이 머무는 곳이 기도하다.

임진왜란은 1592년 선조25년 5월23일부터 1598년 12월16일까지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7년간 혹독한 동아시아에서의 국제전쟁이었다. 충무공의 백의종군은 1597년 4월1일 시작해 당시 조정의 당파싸움으로 인한 모함과 왜군의 반간계로 선조왕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모진 고초를 겪고 의금부로 투옥되었다가 명을 받아 전쟁에 나서게 됐다.


“신의 죄 없음을 굽이 살피소서, 저 한 몸이야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건 없건마는 이 나라 일은 어찌하리오” 백의종군 길은 전체적으로 4개월이나 걸렸던 거의 640Km로 한양에서 충청 경상 전북을 거쳐 전남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이다. 마지막 석주관 코스는 구례읍에서 섬진강을 따라 하동쪽으로 구레읍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러 높이 약 10m 낭떠러지가 바로 석주관이다. 전라도 경상도를 연결해주는 지리산의 요충지로 구례 남원으로 향해 침입해오는 왜적을 방어하는 전략지로서 다수 순국선열들을 모셔놓은 사적비이다.

백의종군 길에도 이순신장군은 시련을 한탄하기보다 옛 부하들과 적정정보를 수집하는 등 준비하는 활약은 훗날 지휘권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위기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충무공정신은 준비된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제공한다.

충무공은 오늘 “반드시 죽기로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이라 하였다. 충무공은 부하들과 소통의 돈독한 인간관계도 유지하고 있었다. 백의종군은 이순신장군의 인내와 결단력,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가득해 나라를 위한 이순신의 활약을 후대에까지 귀감이 되어 그의 리더쉽과 전술은 많은 연구와 숭고한 대상이 되었다.

그 당시 잠시 삼군수군통제사이던 원균이 칠전량에서 왜군과 교전 중 대패하여 한산도의 삼군통제영까지 왜군에 넘어가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이런 전황에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 하게 되었다. 이 때에 바로 명랑해전에서 12척의배로 133척의 왜적을 퇴패시키고 1598년 11/18-19일 도요토미의 사망과 함께 패주하는 500여척의 적선과 끝까지 추적하여 격멸시켰다..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끝까지 왜적을 섬멸하려다가 적탄에 맞아 장엄하게 전사하였다. 장군은 “이 위급한 상황에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하는 엄중한 유언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며 전쟁사에 영원히 새겨지리라.

임진왜란 7년 동안 국난의 위기 속에 이순신장군은 구국의 영웅이며 후손대대로 기려야할 순국영웅이다. 역사가는 세계해전사의 명장으로 동양의 충무 이순신 장군과 영국의 넬슨제독 뿐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영국의 빌라드제독은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견줄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할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 이순신 제독뿐이다’

넬슨도 훌륭한 장군이고 역사의 한 인물이다. 그러나 정부에서 큰 도움도 없이 우국충정의 신념으로 극한의 조건에서 승리한 이순신장군이 더 위대한 평가를 받지 않는지 오늘도 섬진강은 남도 백의종군 길을 감돌며 이 충무공의 애환을 안은 채 맑고 선명하게 흐른다. 순국선열의 넋이 깃든 생명의 강임에 틀림없다.

섬진강의 용두골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황혼 빛이 현란하게 부서지는 시간. 시원한 강바람이 온몸을 적신다.

<양상훈 수필가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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