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 속 하루] 지상 최대의 작전, 노르망디 상륙

2025-06-06 (금) 12:00:00 최호근 / 고려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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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암스테르담 시내에 숨어 지내던 안네 프랑크 일가에게 연합군의 프랑스 해안 상륙 소식이 전해졌다. 2년 넘게 지속된 은둔 생활에 지친 안네 가족에게 이보다 더 기쁜 뉴스는 없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삶의 의미를 찾아서’의 저자 빅토르 프랑클은 공포스러운 테레지엔슈타트 게토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나치즘의 억압에 숨죽이던 유럽 사람들에게 6월 6일 단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감격스러운 해방 서사의 시작이었다. 훗날 인천 상륙작전의 모델이 된 이 작전은 4년 전 뒹케르크에서 퇴각해야 했던 연합군의 통렬한 복수극이었다. 종전 후 미국의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최고사령관에 임명됐고,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지상군을 지휘했다.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별칭답게 연합군 측에서만 39개 사단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이 투입됐다. 현란한 기만작전 때문에 독일군은 연합군의 상륙 지점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었다. 불순한 일기까지 더해져 방어의 총책임을 진 독일군의 명장 에르빈 로멜도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 노르망디 일대에는 많은 기념물이 세워졌다. 가장 유명한 것이 캉 전쟁기념관이다. 이름과 달리 캉 기념관은 호국안보를 강조하지 않는다. 무기 전시를 절제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전쟁을 견디며 삶을 이어갔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기념관이 추구하는 평화는 무엇보다 옥외에 있는 총신이 구부러진 권총 조형물과 기단부에 선명하게 각인된 ‘비폭력’ 글자가 확인해준다.

대규모 작전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상륙 거점을 확보하기까지 연합군은 독일군의 공격에 노출됐다. 독일군의 해안 포대를 무력화하면서 상륙한 부대의 출구를 확보하기 위해 공수부대가 후방에 투입됐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나오는 101사단도 그중 하나였다. 많은 변수 때문에 큰 희생을 치렀지만 공수부대의 활약 덕분에 독일군의 혼란도 가중됐다. 연합군의 제공권 장악 때문에 독일군은 반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최호근 / 고려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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