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70대 한인의 이혼과 죽음

2025-06-05 (목) 04:55:51 김 발렌티나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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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회에서 ‘이혼’은 더 이상 금기시되지 않는다. 개인의 선택, 행복을 위한 전환점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보편화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혼이 그렇게 가볍고 자유로운 선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노년의 이혼은 때로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깊은 고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가 만난 70대 J 씨가 그런 경우였다. 지난해 가을, 워싱턴한인복지센터에서 프런트 데스크 자원봉사를 하던 중 그는 조심스럽게 내 손에 낀 묵주반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당 다니시네요.” 그 한마디가 우리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며칠 후, 그는 느닷없이 바다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나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그는 금세 울먹이며 사과했다. “무례했지요. 하지만 제 이야기를 들어준 분은 자매님뿐이에요.” 그 말이 마음에 남아, 결국 우리는 함께 바다로 향했다. 차 안에서 그의 인생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꿈은 소박했다. 한국에 있는 작은 집에서 아내, 아들과 함께 노후를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고 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모든 경제적 결정을 아내에게 맡겼고, 그녀의 현명함에 감사하며 묵묵히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가족 안에서 점점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했다. “같은 집에 살아도, 나는 그 집 식구가 아니라는 느낌이었어요.” 결국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그는 용서를 빌었지만 돌아온 건 냉정한 침묵뿐이었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는 가족은 이미 떠나 있었고,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그는 혼자가 되었다.

이혼 후 그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졌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수없이 자신에게 되물었고, 때때로 울음을 터뜨리며 “나, 어떻게 살아야 해요?” 하고 묻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점점 그를 상담의 대상이 아닌, 기도해야 할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다. “성체조배 하세요. 고통 속에도 예수님은 함께 계세요.” 그렇게 말하며 함께 기도했고, 그는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어느 날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오늘 고해성사 받았어요. 신부님이 제 손을 꼭 잡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주셨어요.” 그날의 미소는 지금도 내 마음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는 삶을 다시 정비하기 시작했다. 야간 8시간 근무하던 직장을 6시간 일하는 곳으로 옮기고, 체력 관리를 위해 헬스장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는 좀 편해졌어요.”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그의 전화가 끊겼다. 매일같이 안부를 전하던 그가 일주일 넘도록 연락이 없자 불안감이 밀려왔다. 버지니아 센터빌에 소재한 그의 집을 찾았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그 안에는 이미 홀로 조용히 세상을 떠난 J 씨가 계셨다. 그 누구의 곁에도 없이, 그렇게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경찰에 신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차, 소방차, 구급차 등 10여 대 이상이 몰려왔다.

J 씨의 삶은 특별한 사건들로 가득 찬 인생은 아니었다. 조용히, 성실히, 검소하게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가 맞이한 이혼과 외로움, 그리고 죽음은 우리가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장례식도 없이 화장으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 아프다.

노년의 이혼은 단순한 관계의 해체가 아니다. 그 안에는 소속감 상실, 정서적 고립, 정신적 붕괴가 함께 온다. 그리고 그 끝은 종종 삶의 단절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이혼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정하는 만큼, 그 뒤에 남겨지는 정서적·물리적 고립에 대해서도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노년 세대에 대한 배려와 지원은 더욱 절실하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경종이 되길 바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없이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단 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란다. J 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사랑받는 존재로 계시고, 이 땅에는 그를 기억하고 기도하는 친구가 있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김 발렌티나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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