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굴뚝에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전 세계가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새 교황 레오 14세의 즉위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첫 메시지는 간결했다. “평화가 모두와 함께 있기를!” 그는 온 세상에 평화를 기원하며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100여 년 전 고종 황제가 교황에게 보낸 편지가 떠올랐다. 1904년, 제257대 교황 비오 10세의 즉위를 축하하며 고종은 친서를 바티칸으로 보냈다. 붉은 어보가 찍힌 한문본 외교문서였다. 지금은 라틴어·불어·이탈리아어 등 여러 번역본이 함께 보관되어 있다. 보낸 국명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였기에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이다.
이 편지는 한 세기 넘게 잊혀 있다가 2016년, 바티칸 사도문서고에서 한 문헌 보존 전문가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이후 전주의 한지 장인들이 빛바랜 원본과 동일한 규격과 질감으로 복본을 만들었고, 2017년 한 세트는 교황 프란치스코에게, 또 한 세트는 바티칸 문서고에 전달하였다. 전주시가 보관 중인 복본에는 대한제국 국새(붉은색 사각형 도장)와 한문 축하 메시지가 또렷하게 담겨 있다.
편지 속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교황 성하의 즉위를 삼가 축하하오며, 부디 우리 대한국에도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고종은 도덕적 권위의 상징인 교황에게 조국의 평화와 안위를 위한 기도를 간절히 요청한 것이다. 외교의 마지막 선을 펜으로 지키려 했던 그의 절박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같은 시기 고종은 이탈리아국왕에게 ‘중립선언’ 지지를 요청했고, 독일황제에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친서를 보냈다. 1907년에는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거센 무력의 돌풍 앞에서 그는 문서 한 장 한 장에 혼을 실으며, 패권이 휘두르는 침묵의 외교전 속에서도 끝까지 나라의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것이다.
그중 교황에게 보낸 편지는 더욱 특별하다. 가톨릭이라는 세계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보고자 했었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고통 중이나, 우리는 엄연한 자주국이다.” 고종은 이 외침을 교황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 나라를 짊어진 자로서, 그의 절규가 100년을 넘어 지금도 메아리쳐 오는 듯하다.
이 편지는 실질적인 외교성과로 이어지지 않았고, 열강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암묵적으로 용인했으며 고종은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했다. 그러나 편지는 살아남았다. 바티칸의 적막한 서가에서 한 세기 넘게 잠들어 있던 이 문서가, 전주 한지에 다시 쓰여 세상에 돌아왔다.
그 사이 세계는 바뀌었고 제국들은 사라졌지만, 편지에 담긴 고종의 진심은 퇴색되지 않았다. 역사의 기억이 희미해져도 인간의 호소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대한제국 황제가 세계를 향해 보낸 간절한 마음이었다. 121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아직도 통일의 문턱 앞에 서 있다. 그때 고종이 남긴 한 장의 편지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떤 진심으로 세계를 향해 서 있는가.”
붉은 어보는 아직도 바티칸의 한지 위에서 은은히 번지고 있다. 새 교황의 흰 연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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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 서북미문인협회 회장ㆍ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