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요단상] 두 장의 손 편지

2025-05-30 (금) 12:00:00 전병두 서북미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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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전 유월은 잊을 수 없는 달이다. 북한군은 탱크를 몰고 25일 새벽 4시경에 남한을 기습 공격하였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남쪽으로 질주하였다.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빠졌다. 미군과 유엔군은 대한민국을 방어하기 위하여 7월 7일 유엔군 창설을 결정하였고 미군을 중심으로 16개국의 전투부대가 파병되었다. 한미 유엔 연합군의 결사적인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통하여 대구와 부산이 함락되지 않았다. 그 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15일)을 통하여 남하하던 북한군의 허리를 끊음으로 승기를 잡게 되었다.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던 스미스 씨를 만난 것은 한국전 참전용사 및 입양 가족 초청 음악회에서였다. 구순을 앞두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은 홍조를 띤 앳된 소년 같았다. 18세가 되던 해 그는 입대하였고 훈련을 마친 후 곧 한국으로 파병되었다. 생, 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거리를 헤매던 고아들이었다. 그는 틈이 있을 때마다 부대에서 가지고 나온 음식과 과자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하루하루 버텨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스미스 씨는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연방 우체국에 취직하여 은퇴할 때까지 근무했다. 문득문득 한국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딸 발로냐는 아버지가 전해 주는 남한의 전쟁고아들 이야기를 듣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한국 전쟁 고아를 입양하기로 의논하였다.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였다. 홀트 아동 복지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주선해 준 한 소녀를 딸로 입양하고 에밀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스미스 씨는 새 손녀를 얻은 기쁨에 밤잠을 설치곤 했다. 스미스가 살고 있는 집에서 오리건 주립대학교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해마다 한국에서 유학생들이 찾아오고 교환교수와 그 가족들도 찾아왔다. 스미스 씨는 한국 사람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에밀리를 소개하는 일을 즐거워하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한국전 참전 용사 및 입양가족 초청 행사가 한국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스미스 씨는 또박또박 눌러쓴 두 장의 손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한 장은 딸 발로냐가 아버지 스미스 씨에게 쓴 편지였다.

“사랑하는 아버지, 제가 아버지께 얼마나 많은 감사를 드리고 있는지 아시기를 바라요. 아버지께서는 북한과 중국으로부터 남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큰 몫을 담당하셨다는 사실 때문이에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한국에 파병됨으로 (우리 집에) 에밀리를 입양할 수 있게 되어서 고마워요. 아버지의 한국전 참가에 대하여 감사드려요. 사랑해요. 아버지. 발로니 드림

다른 한 장의 편지는 입양 손녀 에밀리가 할아버지 스미스 씨에게 쓴 편지였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저의 조국에서 군 복무를 해 주심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할아버지께서 한국에 군인으로 오지 않으셨다면 오늘날 제가 할아버지 집에 손녀로 오지 못했을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신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해 주시기를 바라요. 에밀리 드림”

스미스 씨는 그 두 장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다시 안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밝은 얼굴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18세의 소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파란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였다.

<전병두 서북미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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