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전 때 전쟁 피해 부모 따라 10대 때 도미
▶ 샌디에고에서 우주항공 엔지니어 꿈 접고 사제의 길
▶ 이민자로서 다민족 공동체에 많은 관심 기울여
바티칸 교황청은 샌디에고 교구장 이었던 맥 엘로이 추기경이 수도 워싱턴 DC 교구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석으로 있던 교구장 후임에 마이클 팜 보좌 주교를 임명했다. 샌디에고 교구 뿐아니라 미국 모든 교구에서 베트남 출신 신부가 교구장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샌디에고 한인성당 민광호 요셉 신부는 “레오 14세 교황께서 (교황 착좌 후) 첫 주교 (및 샌디에고 교구장)인사로 지난 주 미사 및 견진성사를 집례하셨던, 마이클 팜 보좌주교를 임명하셨다”고 운을 뗀 후,“인사권이 집중된 주교는 보좌 주교와는 완전히 다르며, 교구 행정 등 모든 것을 관장하기 때문에 굉장히 무거운 자리”라며, “신자들의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주교님이 소임을 잘 하시도록 기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매체에 따르면, 1967년 베트남에서 태어난 팜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참혹한) 전쟁이 극에 달했을 때, 그의 가족은 여러 차례 나라를 떠나려고 했다. 그가 여덟 살 무렵 탈출을 시도했지만 비행기가 꽉차서 실패했고, 그런 다음 배에 몸을 억지로 끼워 넣기는 했지만, 가족은 식량과 물이 부족했다. 그는 “바지선 바닥에 몇몇 어른들과 어린아이들이 누워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모두 시체였다”고 당시의 참상을 회상했다. 탈출에 성공한 가족은 미네소타 농장에 정착했고, 그때 소에게 가슴이 받혔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샌디에고로 이주했을 때는 ‘지상의 낙원’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샌디에고 고교, 샌디에고 주립대학교(SDSU)와 샌디에고 대학교(USD)를 다니면서 수학과 우주항공학을 공부하며, 미래를 설계했다가 철학 수업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고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꽂혀 골똘히 사색에 빠져들었다. 어느날 부친과 저녁식사를 하며 사제직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다고 고백했을 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며, “그건 분명한 반대였다”고 회고했다.
팜은 결정을 미뤘지만 성당에서 봉사할 때, 마음이 가장 편해졌고, “이것이 뭔가 ‘제대로 된 일’이구나 싶었다”고 했다. “부친이 왜 처음에 동의하지 않았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아마 사제가 되면 더이상 가족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부친의 동의 얻어 신학교에 지원했지만, 합격통지도 불합격 통지도 받지 못했다. 그해 동명이인이 신청해 학교행정착오로 서류가 겹쳐졌던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세인트 페트릭 신학교를 졸업하고, 1999년 샌디에고 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교구 대변인은 수년간 오순절 행사로 다민족 공동체가 모여 여러 언어로 진행하는 미사에 늘 참석하셨던 팜 신부님이 보좌 주교로 내정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렇게 웃음 많던 분의) 웃음기가 ‘확’ 줄어들었다며, 그보다 훨씬 무거운 교구의 모든 짐을 진 주교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내려지도록 기도드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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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