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서적 고립’ 파고든 노년층 사기 피해 급증

2025-05-13 (화) 12:00:00 한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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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피해액 49억 달러

▶ 로맨스 스캠·투자 사기 등
▶ 디지털 미숙 악용해 범죄

LA에 거주하는 72세 김모씨는 남편과 사별한 후 홀로 생활해왔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소셜미디어에 가입한 그는 어느 날 한 남성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자신을 뉴욕에 혼자 거주하는 이혼남이라고 소개한 이 남성과 김씨는 매일 안부를 주고받으며 점차 정서적 유대감을 쌓았다. 김씨는 “오랜만에 삶에 온기가 돌아왔다”고 느낄 정도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성은 미국에 있는 자산을 한국으로 송금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김씨에게 대신 송금을 부탁했다. 일정 금액을 먼저 보내주면 수고비도 챙겨주겠다는 제안이 따라붙었다. 처음엔 의심했지만, 그간 쌓인 신뢰와 애정 때문에 김씨는 결국 3만 달러를 송금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직후 남성과의 연락은 끊겼고, 그의 계정도 사라졌다. 경찰 수사 결과, 그는 실제 인물이 아닌 도용된 사진과 가짜 신분을 이용한 ‘로맨스 스캠(Romance Scam)’ 범죄자였다.


이처럼 노년층의 정서적 고립과 디지털 미숙을 악용한 사기 범죄가 미국 전역에서 급증하고 있다. 미국은퇴자협회(AARP)가 최근 공개한 연방수사국(FBI) 자료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60세 이상 노년층이 사기로 인해 입은 재산 피해는 약 49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2023년보다 43% 증가한 수치로, 피해자 1인당 평균 손실액은 8만3,000달러에 이른다.

60세 이상은 전체 연령대 중 사기 관련 신고 건수도 가장 많았다. 지난해 노년층으로부터 접수된 사기 관련 신고는 14만7,000건을 넘었으며, 이는 전체 피해 신고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같은 해 전 연령대를 포함한 미국 내 전체 사기 피해액은 166억 달러로, 전년 대비 33% 증가했다. 전체 평균 피해액은 약 1만9,000달러로, 노년층의 피해가 월등히 크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AARP 사기예방 프로그램 디렉터 캐시 스톡스는 “사기는 모든 연령층에 영향을 미치지만, 노년층이 입는 피해는 그 여파가 훨씬 심각하다”며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정신적 충격, 자존감 상실, 사회적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가장 큰 피해를 낳은 사기 유형은 투자 사기로, 2024년 한 해 동안만 18억달러 이상의 손실이 발생했다. 이어 기술 지원 사기(9억8,200만 달러), 로맨스·신뢰 기반 사기(3억8,900만 달러), 비즈니스 이메일 사기(3억8,500만 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특히 암호화폐 투자 사기의 확산이 우려된다. FBI 금융범죄 수사국의 크리스토퍼 델조토 국장은 “지난해 암호화폐 관련 사기 신고는 4만1,000건 이상이었고, 피해액은 58억 달러에 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부분의 사기 조직은 동남아시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돼지 도살(Pig Butchering)’이라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돼지 도살’은 피해자와 장기간 신뢰 관계를 구축한 후, 허위 암호화폐 지갑이나 가짜 투자 사이트에 돈을 입금하게 해 결국 전액을 가로채는 방식이다. 피해자는 초기에 투자 수익을 얻는 듯한 착각에 빠지지만, 투자금이 커질수록 전액을 잃게 된다. FBI는 또 암호화폐 ATM을 통한 송금 유도 사기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노년층이 사기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선 몇 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예상치 못한 전화나 메시지, 링크에는 즉각 반응하지 말고, 모든 요청은 반드시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상의한 뒤 판단할 것을 권고한다. 특히 사기범들은 피해자에게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압박하는 공통된 수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대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FBI는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가까운 경찰서나 FBI 산하 인터넷 범죄 신고센터(IC3.gov)를 통해 신고해 줄 것을 당부했다. 아울러 가족과 이웃, 사회 전체가 노년층의 정서적 고립을 줄이고, 디지털 정보에 대한 접근을 돕는 등 예방 노력에 함께 나설 것을 촉구했다.

<한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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