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2025-04-29 (화) 08:04:13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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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니쉬 사자성어, 노구찬대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마흔이 넘어 마켓일을 배웠다. 패자부활전이랄까, 새로운 시작에는 히스패닉이 함께 했다. 이들은 손님이고 또 동료였다. 라틴 음악으로 귀가 멍멍한 수퍼 매장은 내가 얼치기 스페니쉬를 배운 교실이었다.

돌아보면 늦은 만큼 어설프기가 짝이 없는 신입이었다. 논산훈련소 마치고 자대 배치 받아 고문관 소리 들어가며 헤매던 신병시절로 돌아간 것이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에서 온 스물 안팎의 어린 친구들이 내 사수가 되어 이 늙다리에게 하나하나 가르쳐줬다. 고마운 이웃이었다.

일머리, 공부머리가 따로 있고 세상에는 몸으로만 학습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제대하고 이십 년 지나 다시금 깨달았다. 이를테면 한줄로 서서 물건을 나를 때에는 마주보며 지그재그로 서는 것이 물류의 기본인데 제자리 못찾는 나만 끼어들면 흐름이 막힌다. 박스는 커터 칼날 위에 엄지를 대고 눌러가며 오픈해야 안전하다는 사실, 골백번 얘기해도 흘려듣다가 한번 제대로 피를 보고서야 이해한다. 몸으로 배우는 일이 그렇다.


일머리가 조금씩 깨고 요령이 붙기까지 숱하게 들어야했던 소리가 있었으니 오늘의 사자성어 ‘노구찬대’다.

죄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깡통들인데 선반의 진열 순서가 뒤바뀌었나, 어느새 뒤에 나타난 헤수스가 한마디 하고 잡아준다. “노구찬대~” 미끄러운 비닐포장의 붉은콩은 내무반 관물대처럼 각을 제대로 잡아서 쌓아야 하는데 내가 하고 돌아서면 바닷가 모래성처럼 무너지니 그걸 보고 훌리오가 “으음, 노구찬대”, 내 담당 꼬랑(isle)의 선반에 물건 빠져 폭탄 맞은 빈 자국이라도 보이면 야채칸의 힐베르또가 지나가며 또 한마디, 노구찬대!

노구찬대 노구찬대, 그게 도대체 뭔말이냐, 못 알아듣는 표정을 보이면 더 의아해 하는 얼굴로 되받는다. “몰라? 노구찬대?”
꼬레아노, 한국말인데 왜 못 알아듣느냐는 것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봐선 장난은 아니다. 노구찬대 노찬구대 노구대찬… 놀부의 화초장 타령처럼 되뇌여도 알 수가 없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왠지 그럴듯한 어원과 고사를 지닌 것 같은 노구찬대는 어느날 시시하게, 허무하게 그 정체를 드러냈다.

딜리버리가 늦었는지 아니면 게으름을 좀 피웠는지 계란 섹션이 훵하니 비었다. 화장실 가는 길에 이를 본 젊은 사장님이 데어리 담당 꼴로초를 불러서 한마디, “노 굿(No good)이야 안돼!”
아하! 사장의 18번 레퍼토리, 노구시야안대… 빨리 하니까 내 귀에도 그렇게 들리네. 노구찬대.

노구찬대가 그 수퍼에서만 알아듣는 한국어 사투리라면 히스패닉 직원들이 제대로 하는 한국어 표준말도 있다. 아마도 한인 고용주-히스패닉 종업원 형태의 업장이라면 어디나 통할 공통어일 것이다. 빨리빨리. 성질 급한 한인들의 상징이 된 빨리빨리. 한인 사장님들 밑에서 일을 한 히스패닉 직원들은 영어 ‘허리 업(hurry up)’보다 먼저 배우는 외국어가 ‘빨리빨리’일 것이다.

히스패닉들과 일을 해본 한국분들 중에는 ‘빨리빨리’ 한번 외치고 ‘뿌라떼’라는 말을 덧붙이는 경우가 있다. 나도 따라서 뿌라떼 뿌라떼 따라 했는데 독학하던 스페니쉬 교본에서는 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많이 쓰는 말인데.

시간이 흘러 알고보니 정확히는 ‘아뿌라떼’(Apurate)다. 앞에 아 소리가 약하게 엇박자로 들어가니 잘 들리지 않아서다. 손님한테는 정중하게 ‘아뿌레세’ 해야 한다고. 서두르시지요.

몸 쓰는 작업의 가나다이자 ABC는 위로, 아래로, 아리바(arriba), 아바호(abajo). 그 수준을 넘어서려고 스페니쉬를 열심히 배웠다. 근력이 딸리니 소통능력이라도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나를 같이 일하던 친구들은 재미있어 했고 가르치는 재미를 냈다. 하루에 한마디씩(una palabra un dia) 새로운 말을 가르쳐 주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죄다 19금 슬랭이곤 했다. 몹쓸 인간들. 하기사 나도 러시아어, 로싸 가르쳐준다며 이노무쉬키들 했으니 피장파장이다.

어느 정도 마음이 열릴 사이가 되면 신세 한탄도 나눈다. 무초 트라바호, 포코 디네로(mucho trabajo, poco dinero). 일은 많고, 돈은 적고… 봉급 불만이야 사람 사는 어디에나 있는 만국공통어, 그저 입에 달고 사는 불평이라 여기며 같이 웃으며 받아넘기곤 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세월이 흘렀다. 나는 대머리 영감이 되었고 스물 갓 넘겼던 내 고참들도 배 나온 아재들이 되었겠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어려운 시절이지만 영민한 청년들이었으니 어떻게든 잘 살고 있겠지. 우연히라도 한번쯤은 마주쳤으면 싶다.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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