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만성 오작동 ‘희망 회로’

2025-04-09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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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지난 4일(한국시간) 재판관 8명의 전원일치 의견으로 대통령 윤석열의 파면을 결정했다. 윤석열은 즉시 대통령직을 상실했다. 헌재는 “12·3 비상계엄은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위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했다. 헌재는 국회 측이 제시한 5가지의 탄핵 사유를 모두 인정했다. 헌정질서 수호의 최후 보루라는 헌재 소임에 충실한 지극히 합당한 결론이었다.

헌재의 결정이 늦어지면서 출처 불명의 근거 없는 주장을 담은 지라시들이 쏟아져 나오는 등 인용과 기각을 둘러싼 온갖 추측들이 어지럽게 난무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갈등과 긴장감은 폭발 직전의 수위로까지 치달았다.

하지만 헌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상식을 지닌 사람들은 헌재가 압도적 다수로 인용 결정을 내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만큼 법리상 윤석열의 위헌 혐의는 너무나도 명백했으며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들은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정작 심판의 대상자인 윤석열 본인과 그의 참모들은 탄핵심판 선고 날 아침까지도 기각이나 각하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직원들은 윤석열의 복귀를 전제로 현충원에 사전 답사를 다녀왔던 것으로 파악됐다. 또 윤석열의 복귀에 대비한 대국민담화 발표와 부처 업무보고까지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들뿐 아니라 궤변과 억지주장으로 내란행위 옹호에 앞장서온 대다수 국민의 힘 의원들까지 윤석열의 직무 복귀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비상계엄 선포 후의 혼란한 정국을 구독자와 수익을 위한 황금대목으로 적극 활용해온 극우 유튜버들은 한술 더 떠 온갖 엉터리 시나리오들을 퍼뜨리며 극우세력의 윤석열의 업무 복귀 기대감을 마구 부추겼다. 이처럼 허황된 기대를 한껏 높여놨으니 헌재의 전원일치 파면결정에 극우는 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는 8년 전 박근혜 탄핵 때를 그대로 닮아 있다. 박근혜 탄핵 선고를 일주일 앞에 뒀던 2017년 3월 마지막 주 여론조사는 탄핵 찬성 81%, 반대 14%로 탄핵지지가 압도적이었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파면 이후를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헌재의 파면 결정을 관저에서 TV로 지켜봤지만 어떠한 대국민 메시지도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근혜는 참모들로부터 기각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비서실은 직무 복귀를 축하하는 7단짜리 대형 케이크까지 준비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 들어 ‘희망 회로를 돌린다’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절실한 노력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느 정도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합리적 판단이 전제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도피적인 망상으로 ‘정신 승리’하는 것이란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과 여당은 열심히 ‘희망 회로’를 돌렸지만 결과적으로 오작동에 의한 멋쩍은 ‘정신 승리’가 돼 버렸다.

문제는 윤석열 재임 시절 ‘희망 회로’가 오작동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이다. 유치 투표 직전까지도 윤 정부는 사우디와의 대결에서 막판 대역전이 가능하다며 국민들에게 부푼 희망을 잔뜩 안겼다. 결과는 1차 투표에서 119대 29 대참패였다.

이 같은 만성적인 ‘희망 회로’ 오작동은 결코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권력의 현실 인식 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 인식 능력의 결여가 결국 탄핵이라는 정치적 몰락으로 귀결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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