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요단상] 청춘 할매의 봄 뜨락

2025-04-04 (금) 12:00:00 이희숙 시인ㆍ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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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봄날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이 더 써늘하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어느덧 7년째 M 선생님을 모신 공부방에서 시를 나눈다. 문우들은 타국에서 일군 전문직에서 젊음을 쏟던 커리어우먼이다. 평균 나이 산수(傘壽)를 훌쩍 지나고 구순을 넘긴 분도 있다. 나는 그저 7학년 막내일 뿐 심부름을 도맡아 한다. 그분들 삶의 깊이와 열정에 놀라며 배우는 바가 크다.

그런데 화사한 봄빛과 달리 안타까워하는 그분들 속내를 읽었다. 그동안 쌓았던 지식이나 경험도 바람결 기억의 부스러기로 남아 있는 터. 하루 내내 울리지 않는 전화기 앞, 무료한 일상에서 시재 찾기가 힘들다고 하신다. 봄이 되자 워싱턴 DC 포토맥강변 따라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을 그리워하셨다.

“선생님, 여기도 벚꽃이 만발한 곳이 있어요.”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 거기에 가면 안 될까?” “그럼 함께 꽃 나들이 가요!” 순식간에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메마른 땅을 적셔주는 단비 때문에 두 주를 더 기다려야 했다. 봄비에 벚꽃 잎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했다. 차량과 점심을 의논해 마련했다. 한 문우는 맛있는 간식을 준비했다고 하며, 기다리는 마음을 시에 담아 보내주었다. ‘그리 많은 여행을 하고 만남을 가졌어도 문우들과 같이하는 소풍/아직도 며칠 남은 숫자를 하루하루 헤아리고 있다/귀한 설레임/순수한 울렁임/책꽂이에 곱게 간직하겠다’


봄꽃 잔치가 열린 뜨락에 우리 발걸음이 다다랐다. 청춘 할매들의 행렬이다. 눈이 흐리고, 귀는 잘 안 들리고…한 문우는 무릎관절 수술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지팡이를 짚지 않겠다고 하신다. 걱정스레 쳐다보아도 애써 괜찮다 하신다. 연약한 체력을 생각해 짧은 코스를 택했다. 동백 숲을 걸었다. 희고 연한 빛과 아울러 진 빨강으로 정절을 보여주는 듯했다. 열정을 쏟았던 젊은 날을 연상시키는 게 아닌가. 여고 시절 얼떨결 받았던 연애편지를 겁나서 찢어버렸다는 이야기에 우린 공감하며 웃었다, 마음은 여전히 단발머리 시절이기에.

몇 년 전 카메라에 담아 눈에 익었던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분홍 꽃그늘을 기대했는데 웬일인가, 가지만 앙상하다. 꽃잎은 봄비에 떨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못내 흩어져 사라진 벚꽃을 아쉬워했다. 흐르는 시내 물소리에 녹아 내린 연분홍 물결을 추억했다. 냇물 곁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한참 걷다 보니 강렬한 색채가 눈길을 끌었다. 튤립이 군무를 이루었다. 그 몸짓이 냉랭하게 무디어진 가슴을 방망이질 쳤다. 우리는 차례대로 포즈를 취했다. 저리도 좋아하다니! 마음만은 저 꽃 색깔보다 더 곱지 않은가.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었다고 했다. 꽃구경 나온 청춘 할매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하늘가에 닿는다. 우린 각자 가슴에 망울 진 시를 읊었다.

-생략-

마주치는 눈빛마다 생명 머금는다/ 흔들리는 바람 속에 잉태한 꽃망울/ 열리는 꽃잎은 내일을 향한 기도/ 손끝에 닿기도 전 흩날린 벚꽃 잎은 기억의 부스러기/ 머물지 말고 흘러가려 무나/ 머물지 않는 건, 꽃, 네 순리인 것을/ 살아온 자취는 투명한 시간 속을 헤엄치고/ 하늘 약속을 떠올리듯 가볍게 몸을 날린다/ 팝콘처럼 터지는 꽃눈을 스케치하며/ 완연한 봄날 된다// 느낌표를 찍을 수 없으리 만큼/ 솟구치는 감격을 쏟아내며/ 할매의 봄날은 다시 피어나고 있다.

꽃 속에서 웃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액자에 넣어 드리고 싶다. 하나둘…일곱 화폭이 완성될 것이다. 잘 보이는 거실에 걸어두고 오래오래 보실 수 있도록.

<이희숙 시인ㆍ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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