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요 에세이] 그대, 뒷모습은 안녕하신가요

2025-04-02 (수) 12:00:00 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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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에 관심이 간다. 얼굴보다 등에 매력을 느낀다.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기면서부터다. ‘멀리하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 같지만 정작 스스로는 가 닿을 수 없는 나의 뒤, 나의 반쪽. 여행지에서 혹은 일상에서 나 모르게 찍힌 뒷모습 사진을 받아 볼 때가 있다. 사진 찍은 이의 안목이 새롭게 다가온다. 뒷모습 사진은 사진사의 애정 어린 시선이 머물다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쑥스러움보다는 아, 뒷모습 표정이 이렇구나 마치 중요한 것을 발견한 느낌이다. 뒷모습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들에 마음이 간다.

타인의 등에도 호기심이 생긴다. 얼마 전 산불 이후 재개장한 게티 뮤지엄에 가서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작품을 관람했다. 사람의 뒷모습 그림이 눈에 띄었다. 이층 발코니에서 거리를 바라보는 신사, 노를 젓는 남자의 등, 낚시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림 속 인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며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다.

종종 가족이나 친구의 뒷모습을 찍는다. 꽃 사진을 찍다가 꽃의 뒤에 눈길이 머물렀고 잎사귀에까지 이어졌다. 꽃송이를 받치고 있는 숨은 조력자 꽃받침의 존재를 깨달았다. 잎의 뒷면이 궁금해졌다. 연두로 돋는 잎, 한창 짙푸른 잎, 누렇게 시들어가는 잎…. 우리 집에 살고 있는 동백, 장미, 천리향, 재스민, 비파나무, 감나무, 금귤나무, 다년생 넝쿨식물, 깊섶 야생화의 잎까지. 고개를 갸웃갸웃. 한껏 젖혀가며 햇빛에 반사되는 잎맥을 살피고 카메라에 담는다. 앞면보다 뒷면의 잎맥이 더 도드라진다. 가운데 등뼈 같은 잎맥과 좌우로 뻗은 잎맥들이 잎살을 튼튼하게 지탱해 주는 형상이 사람의 등을 닮았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백허그 장면이 나오면 왠지 더 로맨틱하고 달달하다. 상대를 뒤에서 끌어안는 방식은 더 진한 감정의 밀도를 느끼게끔 하는 것 같다. 마주 보며 포옹할 때 심장은 서로의 오른편과 왼편으로 어긋난다. 뒤에서 끌어안으면 심장이 같은 위치에 닿아 팔딱거린다. 그럴 때의 내밀한 교감을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반대로 등끼리 맞대면 천사 날개 같은 견갑골과 등뼈가 서로를 버텨주며 의지가 된다. 앉은 모습은 마치 人(사람 인)을 연상시킨다. 보이지 않는 등과 등을 붙이고 앉아 그 사이에 흐르는 온기를 느껴보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등이 생각난다. 아버지의 등. 서른 초반이었던가. 든든하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애잔해서 눈물이 났다. 참 이상한 게 무심히 불현듯 그런 순간이 왔다. 훗날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아버지가 나무토막처럼 병상에 누워 계실 때 욕창만 생기게 마시라고 기도했다. 전능자의 손길이 어루만져 주시길, 생의 막바지에 수고했다고 쓸어 주시길 헤아려 주시기를 바랐다. 딸이 기특할 때나 안쓰러울 때 아이고 잘했다, 괜찮다 하며 토닥이시던 것처럼. 숨이 멎는 순간까지 아버지의 등은 안녕하였다. 짐을 다 내려놓은 등은 평안하였다.

내 등의 이력에는 주름이 많아서, 음지와 양지가 고루 배어 있어서, 지루하지 않은 등이면 좋겠다. 질문을 던지는 뒷모습을 포착하면 언제든 가슴이 뛸 것이다. 신비로워라, 세상의 모든 뒤여.

<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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