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화산책] 빈 필이 보여준 클래식의 깊이와 전통

2025-03-28 (금) 12:00:00 손영아 문화 칼럼니스트 YASMA7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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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스코틀랜드 경험론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흄(David Hume)은 인간의 사고가 유사성, 근접성, 인과성을 기반으로 한 연상의 법칙(Laws of Association)을 따른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특정한 개념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관련된 기억과 이미지가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현상을 설명한다.

오랜만에 남가주를 방문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Wiener Philharmoniker)의 연주는 이 법칙을 다시금 실감하게 했다. ‘빈 필’ 하면, 오스트리아 빈, 신년음악회, 왈츠, 요한 슈트라우스, 빈 필을 지휘했던 거장들, 빈 필의 연주를 보러 갔던 콘서트홀들, 그리고 그때의 벅찬 감동까지도 한꺼번에 연상된다. 지난 11일 오렌지카운티 시거스트롬 홀에서 라이브로 본 빈 필의 연주는 그런 아련한 기억과 감동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황홀한 경험이었다.

1842년 창단된 빈 필은 왕실극장 소속이 아닌 독립적인 오케스트라로 출발했다.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는 이 오케스트라는 1933년 상임 지휘자 제도를 폐지한 이후 단원들의 투표로 주요 지휘자를 결정하는 자율적인 운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오케스트라가 지휘자의 절대적인 통제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원들이 스스로 음악적 방향을 결정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번 미국 투어에 선택된 지휘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음악감독인 야니크네제-세갱(Yannick Nezet-Seguin)이었고, 프로그램은 슈베르트 교향곡 4번 ‘비극적(Tragic)’과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From the New World)’였다.


미국은 유명 연주자들의 무대는 많은 반면 유명 오케스트라의 초청 공연은 흔치 않은데, 11년 만에 남가주를 방문한 빈 필에서 연상된 또 하나는 ‘전통’이었다. 미리부터 자유롭게 입장해 개인 연습이나 튜닝을 하는 미국의 오케스트라들과는 달리, 빈 필의 단원들은 한꺼번에 질서있게 무대로 등장했고, 짧고 정제된 튜닝을 마친 후 지휘자를 맞이했다. 단순한 차이 같지만, 이런 과정 하나하나가 전통과 품격을 드러낸다.

슈베르트가 시작되자 빈 필의 진정한 저력이 나타났다. 모든 연주자가 지휘자와 함께 움직였다. 튀는 소리 하나 없이 전체가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었다. 특히 드보르작 ‘신세계로부터’ 2악장의 잉글리시 호른 솔로가 흐를 때 감동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연주의 시작에서 끝까지 하나하나 살아 숨쉬는 음과 소리들이 마치 나의 온몸의 세포들을 깨워 흔드는 듯한 그런 감동이었다.

클래식 음악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유산이며, 빈 필은 바로 그 축적된 유산과 결속력 속에서 살아 있는 연주를 한다. 그렇게 전통은 시대가 흘러도 자연스럽게 유지된다. 빈 필의 연주를 들으며 클래식 음악의 본질과 깊이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클래식 음악계의 현실도 돌아보게 되었다.

1990년대 일본에서 생활하던 시절, 열심히 돈을 모아 가고 싶은 연주회의 좋은 좌석을 구하는 젊은 청소년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또 일본은 단순히 유명 연주자들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연주회 자체를 문화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오자와 세이지가 주도한 사이토 기념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프로젝트 오케스트라로 성장했고, 정명훈을 초청해 창단한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일본을 아시아 클래식 음악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크고 작은 어떤 공연에서든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은 관객이 넘쳤다. 그런 관객이 많아질 때 한국 클래식 음악계도 더 넓은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인 연주자뿐만 아니라 한국 작곡가의 작품이, 그리고 한국의 무대 자체가 연상될 수 있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한국’ 하면 연상되는 무대가 하나의 문화 전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때, 한국 클래식 음악계도 진정한 의미에서 성장할 것이다.

이번에 다시 직접 본 빈 필의 연주는 그야말로 역사와 전통이 축적된 클래식의 깊이를 일깨워 주었다.

<손영아 문화 칼럼니스트 YASMA7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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