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 칼럼] 아리랑 아리랑 글렌데일 아리랑

2025-03-18 (화) 12:00:00 로라 김 서예가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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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단발버리 어린 소녀가

옷고름도 살포시 두 손 모아 맨발로 앉아 있다.

싸늘한 2월 아침 햇살이 순한 발등 위를 맴돌며 간다.


지난 2월 22일 토요일 오전, 글렌데일 도서관 앞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는 길원옥 할머님의 추모 행사가 있었다. 13살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 모진 목숨 견디며 한 많은 세월을 사시고 96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신 분. 이 행사는 CARE가 주관하고 미주 화랑 청소년 재단이 행사를 진행했다.

크레센타 밸리고교 10학년인 조건우 군은 긴 추모시로 할머니의 일생을 노래했다. 할머니는 나비셨다고. 일본정부로 부터 배상을 받는다면 그 돈을 세계 전쟁 피해여성을 돕는데 쓰겠다며 만든 ‘나비기금’의 유래. 노래를 좋아하셔서 ‘길원옥의 평화’라는 음반도 만드신 일. 할머니의 마음 속엔 언제나 참담한 삶을 살았던 위안부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고 일본정부로 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평생의 소원이 있으셨다. 그 소원을 못 이룬 채 떠나셨지만, 할머니의 소망을 영원히 기억하고 이제 자신들이 이어가겠다는 그들의 각오와 결심이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는 지난 2013년 7월 30일, 바로 이 자리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될 때 함께 했었다. 노랑과 보라빛 나비로 가신 분들의 영혼을 달래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필리핀 등지에서 끌려간 20만명이 넘는13살에서 20살 사이의 소녀들의 형언할 수 없는 그 참혹한 삶. 당시 이용수 할머님이 오셔서 이제 남은 사람은 쉰명 정도 밖에 안되는데 일본은 전혀 사죄할 생각들을 안한다며 통탄해 하셨다. 그런데 12년이 지난 지금 길원옥 할머님도 가셨고 이제 다섯분만 생존해 계시는데 일본은 사죄를 모른다.

지난 2021년 2월쯤, 하버드 법대의 램지어라는 교수가 전쟁 당시 일본이나 조선의 위안부는 공인된 매춘부였다고 그의 논문에서 밝힌 적이 있다. 조선인 위안부는 납치되거나 매춘을 강요당한‘성노예’가 아니고 조선인 모집업자들에 의해 자원한 매춘부였고 법적으로 인정된 공창이었다고. 위안부 피해 사실은 우리가 만들어낸 ‘순수한 소설’이었다고도 했다. 소설을 쓰고 있는 그들. 나는 당시 그 소식을 읽고 분통하여‘하버드대 교수의 망언 망발’이라는 글을 발언대에 올리기도 했다.

역사는 흐른다. 우리는 그 역사의 흐름을 바르게 흐르도록 관심과 사랑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건우 군은 할머니의 삶이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고 한다. 슬픈 역사를 반복하면 안된다는 것,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진실을 위해 힘을 합해야 한다고 아주 어른스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할머님께서 이루지 못 한 것들은 이제 우리의 몫이라며 고단한 삶을 잊고 나비처럼 훨훨 자유롭게 날아가시길 기원했다.

길원옥 할머니는 단짝 김복동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나도 나비가 되어 만나러 갈게요’라는 편지를 남겼었다. 이제 두분은 반갑게 손을 잡고 나비처럼 춤을 추실게다. 아리랑 아리랑 글렌데일 아리랑!

<로라 김 서예가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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