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사임당은 조선의 명문가 자손인 황산 신씨 집안의 신명화와 용인 이씨 사이의 둘째 딸로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신명화는 강원도의 부자로 노비가 119명, 46,500평의 논과 밭을 소유했다. 사임당이란 이름은 10세 때 중국 고대의 준 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의 현숙한 덕망을 본 받겠다는 뜻으로 스스로 사임(師任)이란 호를 지었다. 당(堂)은 양반집 안채의 현숙한 안주인을 호칭할 때 사용하는 호로 후세 사람들이 신 사임당이라고 불렀다.
총명한 사임당은 10대 초반부터 시문에 능해서 선비들이 사임당의 시와 글씨 필체를 보고 그 비범함에 탄복을 하였다.
사임당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7세 때 조선 최고의 산수화 화가인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고 크게 감동하여 모사해서 그려보고, 이를 계기로 그림과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만 사임당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당시 조선 시대에는 여성은 언문이나 깨우치고 바느질과 수놓기 등 한정된 교육만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여성이 시문을 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사대부 선비들이 용납을 하지 않았다. 사임당의 천재성을 인정한 신 명화는 딸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임당을 지원했다. 아버지는 사임당이 혼기인 17세를 넘긴 딸의 장래를 두고 근심한다. 사임당이 결혼을 하면, 시문과 화가의 길을 접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방책은 남귀여가혼(南歸女家婚)이었다. 신명화는 강릉에 사는 가난한 양반 선비를 물색했다. 이원수를 발견했다. 딸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지켜주기 위해 이원수와 독대하여 간절한 아버지의 마음을 간곡하게 전하며 처가살이를 부탁한다. “내가 다섯 딸이 있는데, 다른 딸들은 시집을 가도 서운하지 않더니 그대의 처만은 내 곁을 떠나 보내고 싶지를 않네. 사임당의 시문과 화가로서의 예술성을 지원해 주시게.”
아버지 신명화의 든든한 지원으로 사임당은 조선사상 전무후무한 여성 화가로 칭송받게 된다. 사임당의 탁월한 그림 실력을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사임당이 부잣집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갑자기 부엌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났다. 가난한 여인이 잔치집에 오려고 빌려입고 온 비단 치마에 음식을 쏟아 얼룩이 져서 난감해 하고 있었다. 사임당이 빙그레 웃으며, “여보세요. 나중에 우리 집에 그 치마를 가져오세요. 내가 손을 좀 봐 드리리다.”라고 말했다. 그날 밤 사임당은 아낙네의 얼룩진 치마에다 포도 넝쿨에 싱싱하게 달린 포도를 그렸다. 이튿 날 여인은 포목전에 가서 주인에게 치마를 팔려고 한다면서 값을 물었다. 이때 치마 폭에 그려진 포도 그림을 보고 경탄한 양반댁 부인에게 큰 돈을 받고 그림을 팔았다. 여인은 사임당에게 그림을 판 돈을 돌려주었다. 사임당은 여인의 손을 잡으며 “이 돈으로 어려운 살림에 보태쓰세요.”라고 따뜻하게 여인을 위로해 주었다.
사임당의 대표작인 꽃과 채소, 곤충을 그린 초충도(草蟲圖)에 관한 일화도 있다. 사임당의 서책과 그림을 정리하는 선비에게 사임당이 선물로 ‘초충도’를 그려주었다. 선비가 초충도 그림을 집으로 가져와서 말리기 위해 햇살이 따뜻한 마당에다 늘어 놓았다. 그때 닭 한 마리가 그림에 다가와서 그림 속의 곤충을 주둥이로 쪼아 구멍을 냈다고 한다.
사임당의 그림을 본 한양의 선비들이 “신씨의 산수화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에 비견할 수 있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소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으리오.”라고 극찬했다. -패관잡기
신 사임당이 사망한 지 108년이 지난 1659년, 당대 성리학의 최고 학자이자 정치가인 송시열이 “사람의 손으로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자연스럽고 감히 인력으로는 범할 수 없는 걸작이다.”라며 사임당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칭찬했다.
사임당은 부와 명예를 모두 성취한 예술가였지만, 가정사는 파란이 많고 행복하지 않았다. 학문을 등한시 하며 가족을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는 남편 이원수에게서 받은 치욕적인 정신적 상처로 몸이 허약해져서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기 전에 사임당은 남편에게 어린 아이들과 가족들을 잘 돌봐 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신 사임당의 위대한 예술적 업적은 세대가 바뀐 대한민국의 현재까지도 모든 국민으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행한 5만원 권 지폐에는 신 사임당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조선의 봉건적 남존여비 사상을 타파한 신 사임당. 세대를 초월해서 만 백성들로부터 추앙받는 신 사임당은 한국인의 어머니이자 최고의 예술가이며, 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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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김 사랑의 등불 대표,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