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의 음악산책>
2025-03-06 (목) 06:07:37
오페라도 멋있지만 포디움에서 필사적으로 지휘봉을 휘두르는 지휘자의 모습을 보는 것도 마치 일인 오페라를 보는 것 같은 감동을 안겨주곤 한다. 판토마임과는 다르지만 지휘자의 지휘 모습 속에는 철학과 작품(해석)에 대한 자기만의 세계가 느껴져 온다.
예전에 지휘자 하면 카라얀을 꼽던 시절이 있었다. 베를린 필이 훌륭했기 때문에 카라얀이 돋보였던 것인지 아니면 카라얀이 훌륭했기 때문에 베를린 필이 돋보였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카라얀과 베를린 필은 레코드 판매 분량으로 보나 지명도로 보나 당대(1965-1985) 최고였다. 카라얀 사망이후 베를린 필의 명성도 한풀 꺾여 암스텔담 콘세르트허바우나 비인 필 등에 밀려 세계 1위 자리에서 물러난지 오래지만 베를린 필이 여전히 자랑하는 부분이 하나 있으니 바로 관악기(브라스) 군단이다. 요즘에도 베를린 필은 세계 유일하게 오케스트라내에 베를린 필이 자랑하는 베를린 브라스 앙상블이 따로 있어 활동할 정도이다.
얼마전 시내를 나가던 중 차에서 베를린 필의 ‘로마의 소나무’가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베를린 필인 것을 안 것은 아니었지만 베를린 만의 브라스는 척 들어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클래식 칼럼을 쓰는 사람 치고는 별로 호감 가는 표현은 아니지만 사실이 그런 것 같다.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주는 매력… (분명 위화감도 따르지만) 정말 아름다울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특히 장괘한 관악기 소리가 들려주는 매력은 정말 아름답다. 관악기는 불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늘 관악기에서 갈린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에는 4악장에 유명한 알프스 뿔피리 소리(슈만의 명칭)가 나오는데 혼 주자라면 누구나 살떨리는 순간이다. 그러나 베를린 필 만큼은 그때가 바로 가장 기다리는 순간이다. 베를린 필만큼 부드러움과 강력함을 겸비한 브라스 앙상블을 들려주는 오케스트라는 또 없다.
레스피기라는 작곡가는 성서에 나오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부활하는 것 같은 섬뜩한 작품(교향시)을 남겨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바 있는 데 바로 로마의 병사들을 초혼(招魂)한 ‘로마의 소나무’가 그것이었다. 특히 (로마의 소나무) 4파트 중 마지막곡 ‘아피아 가도’는 관악기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최고의 행진곡이기도 하였다.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312년 쿠라우디우스에 의해 완성된 고대 로마의 진군도로서 로마병사들의 개선행렬이 지나던 곳이었는데 잡초만 무성한 그곳에서 레스피기는 2천년전으로 되돌아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영혼들을 초혼하여 장대한 행진곡풍 교향시의 영감을 받게된다. 단순한 행진곡이 아니라 을씨년스러운 영혼들을 불러모은 행진곡이다보니 기괴한 환상들이 마구 부풀어 오르는데 곡의 깊이, 예술성을 따지기에 앞서 관악기, 타악기…들이 때려부수는 선율이 묘하게 환상적이면서도 뇌를 흥분시키는 작품이다. 마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동정심이 가지 않지만 이 음악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동정심이 갈만큼, 자신들이 최고가 된 듯한 착각과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카니발같은 작품이라고나할까.
레스피기는 1916년부터 12년에 걸쳐 로마를 주제로 한 3부작(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 을 작곡했는데 그 중 두 번째 곡 `로마의 소나무'가 가장 유명하며 특히 마지막 곡 ‘아피아 가도’가 없었다면 ‘로마 3부작’도 없었다고 할만큼 압도적인 선율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었다. 로마 3부작은 인상주의와 독일 낭만파가 집약된 작품인데 특히 오케스트라가 펼치는 색채가 일품이다.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 시적 풍경화같은 작품인데 ‘아피아 가도’는 애국심까지 분출되어 로마인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2000년도에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 ‘환타지아 2000’에서도 등장하는데 안개 짙은 새벽, 신비스러운 풍경을 지켜보는 외로운 소나무 한그루… 저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옛 시인은 지난날의 영광된 환상의 모습을 떠올린다. 고조되는 트럼펫 소리… 승리에 도취한 군인들이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으며 카피토레 언덕 위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행진해가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는 장대한 징소리와 함께 막이 내린다. ‘로마의 소나무’는 이태리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1926년 미국 초연으로 지휘한 작품이며, 1945년에는 뉴욕필에서 연주된 그의 마지막 곡으로 선택한 작품이기도 했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