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테르모필레, 멜로스, 그리고 “강철 고슴도치”

2025-03-04 (화) 12:00:00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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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쳐들어왔다. 당시 그리스는 수많은 도시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고 다 합쳐도 페르시아 병력의 1/10도 안되는 수준이었는데다 그나마 1/3은 중립, 1/3은 항복한 상태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도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저항 세력은 결사 항전을 외쳤다. 일부 학자는 이 싸움을 “소련과 룩셈부르크와의 대결”로 부르기도 한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맞붙은 것은 산속의 좁은 통로가 있는 테르모필레였다. 그리스 최강 육군을 자랑하는 스파르타는 7천명중 정예 300명을 이곳에 배치해 지키게 했다. 첫날은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둘쨋날 에피알테스라는 배신자가 샛길을 밀고하는 바람에 300명 전원이 전사한다. 이들의 위업을 기려 “지나가는 스파르타인들이여, 우리는 조국의 명령에 복종해 여기 누워 있다고 전해주시오”란 비석이 이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들의 영웅적인 희생에 감동한 그리스인들은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테아 전투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페르시아 인들을 몰아내고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60여년이 지난 기원전 416년 이곳에서 멀지 않은 멜로스 섬에서 또 다른 전투가 벌어진다. 페르시아 전에서 대승을 거둔 그리스는 누가 맹주인가를 놓고 내전이 일어난다.

당시 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아테네는 에게해 해상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남은 곳이 멜로스라는 섬이었다. 스파르타와 조상은 같지만 전쟁 중 중립을 지켜온 멜로스는 아테네 편에 서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중립을 고집하며 정의가 우리 편에 있기 때문에 신도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아테네 대사는 ‘강자는 원하는 것을 하고 약자는 당해야 하는 것을 당하는 것이 세상의 원리’라며 ‘이 원리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며 우리는 이에 따를뿐’이라고 말한다. 멜로스 또한 결사항전을 외치지만 남자는 모두 살해당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간다.

그후 10여년이 지난 기원전 404년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던 아테네는 전쟁에서 져 스파르타의 군화발에 밟히고 그 스파르타마저 테베에게 패해 망하며 이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힘을 키운 마케도니아에게 그리스 전체가 복속된다. 한 때 페르시아를 정복하며 위세를 떨쳤던 마케도니아도 알렉산더 사후 분열한 뒤 모두 로마에게 망하고 그 로마마저 게르만족에 의해 종말을 맞는다.

2천여년전 테르모필레와 멜로스에서 일어났던 일이 21세기 우크라이나에서 되풀이되려 하고 있다. 지난 주 도널드는 광물 협정을 체결하러 온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을 모욕을 주며 쫓아냈다. 그 이유는 젤렌스키가 미국에 감사 표시를 하지 않았고 미국의 안전 보장 없는 협정에 서명을 거부했기 때문이라는데 젤렌스키의 잘못은 러시아의 푸틴이 그동안 수많은 휴전 협정을 위반했다는 것을 지적한 것뿐이고 공식적으로도 미국에 33번 감사를 한 기록이 있다.

도널드는 지금까지 계속 전쟁 책임을 우크라이나에 돌리다 지난 주에는 북한, 러시아와 한편이 돼 러시아의 전쟁 책임을 명시하지 않은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로써 우리가 알던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리더로서의 미국은 사라졌다고 봐도 된다. 수년째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나라가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에게 광물 소유권 이전을 요구하는 냉혹한 이권 추구 국가만 남았다.

이 사태를 목격한 유럽은 일제히 우크라이나 편에 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럽 주요국 지도자들은 런던에서 모여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연합체 결성을 추진키로 했다. 스타머 영국 총리는 “우리는 역사의 기로에 서 있다”며 “유럽은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젤렌스키와 만난 스타머는 우선 군사 장비 구입을 위한 28억 달러의 차관과 5천개의 방공 미사일을 살 수 있도록 20억 달러의 수출 융자를 해주겠다고 밝혔다. 유럽위원회 의장인 우르술라 폰 데르 라이엔도 유럽 연합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결제 군사 지원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잠재적 침략자가 삼킬 수 없는 강철 고슴도치”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우크라이나가 무너지면 그 다음은 발트해 3국과 동유럽이 위협받고 이들이 러시아 지배 아래 떨어지면 서유럽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상식적인 판단에서이다.

그러나 유럽만으로 미국의 지원 없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공격을 버텨낼지는 의문이다. 젤렌스키가 끝까지 굴복을 거부한다면 우크라이나는 테르모필레의 300 전사와 비슷한 운명을 맞게 되고 세계는 침략자의 본색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제2차 대전 후 세계가 국지전을 제외하고 그런대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력으로 국경을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과 이를 뒷받침하는 미국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원칙이 무너지려 하고 있다. 도널드를 선택한 미국인들은 전보다 훨씬 불안정한 세계를 맛보게 될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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