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2025-03-03 (월) 12:00:00
조형숙 수필가 미주문협 총무이사
겨울 비는 서두르지 않는다. 거칠지 않고 빠르지 않게 조용히 내린다. 겨울은 한 해의 끝자락이지만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다. 차가움 속에 온화함이 보이는 것은 봄이 온다는 신호일지 모른다. 하늘이 충분히 낮아져 방울방울 떨어지면 땅은 기다린 듯 감싸 안는다. 봄을 품고 있는 잎이 묵은 겨울의 등을 살그머니 떠민다. 겨울 비는 이미 봄과 섞여 땅을 적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겨울비는 또한 쉼표다. 차갑게 쉬면서 봄의 따사로움을 기다리게 한다. 삶이 만난 겨울의 무거운 일 들이 지나면 땅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밝은 숨을 쉰다. 우리가 생각지 않는 사이에 내리는 겨울 비는 불현듯 신호없이 찾아오는 우리 삶과 닮아 있다. 우리 곁으로 슬며시 다가와 부정하지 않고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성품을 가르친다.
비 오는 날이면 언제나 만났던 친구가 있다. “네가 올래 내가 갈까?”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친구는 김밥 말고 커피 탄 보온병을 들고 집 앞에 도착한다. 반가움의 수다를 떨며 악셀을 힘있게 밟으면 어느새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앞이다. 조금 윗 쪽에 있는 발코니에서 비 내리는 숲을 내려다 보면 마치 나무 위에 선 듯 모든 숲이 눈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다. 하늘은 더 가까이 내려오고 손을 펴면 구름과 닿을 듯 하다.
도시가 빗물에 젖는 동안 미술관은 더욱 조용하고 우리는 명화 속으로 들어 간다. 조용히 작품 앞에 몰입하는 사람, 손을 턱에 괴고 생각에 잠긴 사람, 멀리에서 가까이에서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사람, 작은 노트에 메모하는 사람, 바닥에 앉아 그림을 따라 그리는 사람, 아이와 함께 온 엄마, 설명을 주고 받는 남녀. 그림을 보며 느리게 옆으로 발을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따뜻하고 평온하다. 부드럽게 붓질 하는 화가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나도 화가 인 듯 착각하며 전시관을 돌아 본다.
미술관을 나왔을 때 눈 앞에 생생한 그림을 마주했다. 붓도 없고 팔레트도 없는 거대한 캔버스가 사실적 표현을 하고 있었다. 거리 중앙에 있는 수직의 가로등 사이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걷는다. 일찍 나선 가로등 불빛에 도로는 반사되고 구부정하게 우산 속에 묻힌 사람들, 귀가를 재촉하는 잽싼 걸음, 비를 즐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흐릿해 보이는 거리의 풍경 속에서 발걸음은 오히려 경쾌해 보였다. 빗방울이 우산 위로 떨어진다. 보도 블록에 돌이 하나 빠져 나와 생긴 작은 물 웅덩이 위로 검은 구름이 내려 앉았다. 돌멩이 하나 던져 넣었다. 웅덩이 물이 잔물결을 일으켰다. 빗속을 천천히 걸었다. 회색의 길은 비를 따라 계속 이어져 있었다.
겨울 비로 땅은 봄을 준비한다. 잎이 하나도 없이 검고 말라 있는 나무를 본다. 차가운 빗줄기에 흔들리고 있는 잔 가지들의 황량한 모습은 마음을 슬프게 한다. 지난 한 해 여린 잎새에서 진홍의 열매가 되기 까지 보여 주었던 나무의 찬란한 한 해가 흘러 갔다. 그러나 땅 속에서 새로운 시간을 준비하는 여린 잎의 노력을 나는 알고 있다. 겨울비가 쓸쓸한 느낌만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디에선가 계절의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계절을 잇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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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숙 수필가 미주문협 총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