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박물관은 붉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섬뜩한 핏빛을 쏟아낸다. 매사추세츠 보스턴 근교의 세일럼 시다. 이곳은 ‘평화’를 뜻하는 이름과 달리, 미국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 마녀사냥의 중심지다. 고풍스러운 건물에 들어서면, 유리 진열장 속에 전시된 뉴잉글랜드의 소박한 복식과 함께 당시의 기록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극장에서는 17세기 세일럼에서 벌어진 마녀재판이 인형들로 재현된다. 어두운 조명 아래 재판과 처형 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지며,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들의 고통에 방문객의 가슴을 조인다.
1692년, 작은 청교도 공동체였던 세일럼은 금기된 놀이가 발각되며 비극의 서막을 열었다. 발가벗고 춤을 추고 주술을 외우던 소녀들은 처벌을 피하고자 악령에 사로잡힌 척 연극을 시작했다. 이후 소녀들의 거짓 증언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번졌고, 악마와 싸운다는 명분 아래 개인적 원한과 복수심이 결합해 폭발했다. 서로를 의심하며 고발하는 가운데, 19명이 처형되고, 수십 명이 감옥과 고문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녀사냥은 종교적 신념을 가장했으나, 그 본질은 불안한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 공포와 인간의 탐욕, 그리고 정치적 음모가 결합한 집단적 광기였다.
박물관 극장의 무대는 마녀재판의 잔혹한 역사를 13개의 무대가 360도 돌아가며 적나라하게 재현한다. 마녀재판 상황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화형대, 단두대, 그리고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조명 아래 억울하게 박해받은 이들의 고통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마녀가 아니다’라는 유리 상자 속 인형들의 침묵은 당시의 절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처럼 그들은 귀를 막고, 진실을 외면하며,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었다. 관람을 마친 뒤, 극장의 둥그런 원형 무대에 선 순간, 마치 그 시대에 갇힌 듯 서늘한 기운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이곳에는 두 작가의 혼이 깃들어 있다. 아서 밀러는 그의 희곡 《시련》에서 마녀재판을 통해 미국 사회의 광기를 비판했다. 그는 작품 속에서 “복수가 법을 만들고 있다”고 외치며, 집단적 공포가 법과 정의를 왜곡하는 현실을 고발했다. 나다니엘 호손은 자신의 조상이 마녀재판 판사였다는 부끄러운 사실에서 출발해 《주홍 글씨》와 《젊은 굿맨 브라운》으로 청교도 사회의 위선과 억압을 비판했다. 그는 조상의 죄업을 부정하기 위해 성에 ‘w’를 추가해 Hawthorne으로 바꾸며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마녀사냥은 현대에도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직장에서의 음모, 학교에서의 왕따, 사회적 편견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낳고 있다. 모두가 Yes를 외칠 때, No를 말하는 용기는 시련을 불러오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과제다.
박물관을 나오며, 생각했다. 진실과 진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서 밀러는 ‘가식을 벗는 것이 진리’라 했고, 나다니엘 호손은 ‘진실은 완전히 바로잡히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 말했다. 그들의 문학은 세일럼의 광기를 넘어서,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을 묵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관광지로 변해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했던 ‘마녀’가 공식적으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도시다. 그 시대에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고뇌와, 오늘날 자신을 마녀로 정체화한 사람들의 혼란이 교차한다. 이들의 메시지는 여전히 묵직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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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