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부터 1902년까지 벌어진 ‘미 필리핀 전쟁’은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당시로서는 미국이 가장 많은 피를 흘린 해외 전쟁이었다.
1898년 ‘미 스페인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당연히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미국 차지가 돼야 한다고 믿었지만 필리핀 사람들 생각은 달랐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던 것처럼 필리핀도 독립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결과는 3년에 걸친 무자비한 전쟁이었다.
필리핀 독립군 지도자였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처음에는 정면 승부를 벌였으나 곧 화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미군과의 정규전은 무모하다는 것을 깨닫고 게릴라전으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민간인 틈에 숨어든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양민 학살을 자행했고 이 패턴은 그 후 월남전과 한국전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미군 4천200명과 필리핀군 2만명, 민간인 20만명이 사망한다. 이 필리핀 전쟁을 이끈 사람이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이다.
그 후 120여년간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맥킨리라는 이름이 요즘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올해 대통령이 된 도널드가 그를 롤 모델로 삼으며 찬사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취임사에서 “위대한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의 이름을 맥킨리 산에 돌려 주겠다”며 “그는 관세와 재능으로 우리를 매우 부유한 나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2015년 오바마 대통령은 북미 최고봉인 이 산 이름을 맥킨리에서 원주민이 부르던 이름인 데날리로 변경한 바 있다.
도널드가 맥킨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한 때 도널드보다 관세를 좋아해 ‘보호 무역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오하이오 출신 공화당 연방 하원이던 그는 미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고율 관세의 필요성을 역설해 연방 의회는 1890년 ‘맥킨리 관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이 통과된 후 잠시 비즈니스는 호황을 맞는 듯 했다. 외국산 물건 수입이 줄면서 국내 산업 생산량은 늘어나고 일자리도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값싼 수입품이 감소하며 물가는 오르기 시작했고 유권자들은 분노했다. 맥킨리는 그해 선거에서 떨어졌고 2년 뒤에는 같은 오하이오 출신으로 공화당 대통령이었던 벤저민 해리슨마저 낙선했다. 집권에 성공한 민주당은 1894년 관세를 낮췄다.
이 때 일로 관세에 대해 생각이 바뀐 맥킨리는 1896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무역 전쟁은 이익이 나지 않는다. 선의의 정책과 우호적인 무역 관계가 보복을 막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집권 기간 무역 협정과 친선 외교를 통해 교역을 늘리는데 힘썼다.
그는 또 미국의 영토를 늘리는데 적극적이었다. ‘필리핀 전쟁’을 통해 필리핀을 먹은 것은 물론 괌과 푸에르토 리코를 미국 식민지로 만들고 하와이도 합병했다. 맥킨리를 숭상하는 도널드가 그린랜드와 파나마, 심지어는 가자 지구까지 탐내는 것이 심상치 않다. 도널드는 취임사 후 수시간만에 맥킨리는 “‘미 스페인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우리 나라를 승리로 이끌었다”며 그를 치켜세우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맥킨리는 나중에 필리핀에서 사상자가 늘어나자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후회했다. 그는“듀이가 스페인 함대를 물리치고 그냥 떠났더라면 우리는 많은 골치 아픈 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듀이는 마닐라 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한 조지 듀이 제독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이 사건으로 미국의 영웅이 됐다. 맥킨리는 훗날 자신은 필리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훗날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도널드는 그린랜드를 미국 소유로 만들겠다며 무력 사용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이게 허풍이 아니라면 나토 동맹국이자 그린랜드의 주인인 덴마크와 전쟁을 하겠다는 이야기다. 영토 확장을 위해서는 동맹이고 우방이고 필요없고 힘만이 왕인 옛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린랜드는 미국 근처에 있고 러시아와 중국 잠수함이 주변을 맴돌기라도 하지만 200만에 달하는 가자 주민들을 몰아내고 이곳을 미국이 “소유하겠다”는 그의 주장은 더더욱 황당하다. 미군을 사용하지 않고 이를 강제 추방하는 것이 가능할 지도 의문이지만 그 땅을 “소유”하려면 누군가가 지켜야 하고 미국이 소유하고 있는 땅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미군밖에 없다.
원주민을 몰아내고 지중해식 별장을 건설하는 모습을 가뜩이나 기회를 노리고 있는 회교 극렬주의 단체들이 가만히 놔둘 것 같은가. 이라크에서 그 고생을 하고도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도널드의 발언이 진심인지 그냥 툭툭 던져 보는 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국제 정세는 협정이나 원칙, 신뢰는 쓰레기 통에 들어가고 힘만이 지배하는 곳으로 변해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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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