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말 한마디에 운명이 좌우되는 궁정에서는 진실보다 듣기 좋은 말이 환영 받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 무제(漢武帝: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BC 141 ~ BC 87년)의 조정에는 예외적인 존재가 있었다. 바로 재치와 해학으로 무장한 관리, 동방 삭이다.
한 무제는 역사상 손꼽히는 강력한 황제였지만, 정복에 대한 욕망과 미신에 대해 맹신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으나, 동방 삭은 달랐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익살스럽게 황제의 허점을 찔렀다.
기원1세기경 편찬된 <한서(漢書)>에 따르면, 한 무제가 신선을 찾아 불로장생을 꿈꾸며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자 백성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때 동방 삭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폐하, 사실 저는 삼천 년을 살아왔습니다. 이 나라를 세운 황제도 직접 뵈었지요.”황제가 어리둥절해하자, 그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물론, 폐하의 말씀처럼 신선이 존재한다면 말입니다.”
그의 언변은 황제를 웃게 만들면서도 처벌을 피할 만큼 절묘했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권력자의 맹점을 지적하는 날카로운 무기였다. 하지만 그 방식이 경박하지 않고 유머를 동반했기에, 한 무제는 그를 해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동방 삭을 곁에 두며 신뢰했고, 덕분에 동방 삭은 긴 세월을 무탈하게 조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늘날, 실크로드를 개척했다거나 신분에 상관없이 노비조차 실력이 있으면 인재로 등용했다거나 둔전법으로 토지개혁을 했다는 등 한나라 무제의 업적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동방 삭의 이름은 여전히 회자된다.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자의 곁에는 동방 삭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거침없이 진실을 말하되, 미움을 사지 않는 지혜를 가진 자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를 헤아리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한 무제의 비범함을 놓쳐서도 안 된다. 한 무제가 당시 중원의 넓은 지역에 대한 패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강력한 무력을 가졌다는 것뿐 만이 아니라, 동방 삭과 같은 자들의 쓴소리를 견디고, 때로는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유머와 풍자는 사회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지표다. 유머가 빛을 발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허용하는 사회적 여유가 필요하다. 사실 동방 삭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한국사회에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언론인, 풍자가, 시민운동가 나아가 국민들도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낸다. 그런데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제의 미소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품을 수 있는 한 무제가 지녔던 포용력인지도 모르겠다.
김미선 수필가는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사회교육을 전공했다. 뿌리문학 시부문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시애틀 라디오한국 특별수기공모전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북미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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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 서북미문인협회 회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