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학의 힘, 그 슬픔의 미학

2025-01-30 (목) 08:18:59 유양희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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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것을 목숨처럼 믿고, 혼신을 다해 썼을 한강의 침착한 글의 힘이 읽는 이의 가슴에 전류처럼 흐르는 소설이다.

76년 동안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내며 속울음 울어 왔을 제주도민들의 한을 되새기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천 명도 넘는 사람들로 선착장이 가득 찼고 (…) 여자가 아니메, 아니메,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숨이 끊어진 젖먹이를 젖은 부두에 놓고 가라고 경찰이 명령한 겁니다. 그렇게 못한다고 여자가 몸부림을 치는데, 경찰 둘이 강보째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고 여자를 앞으로 끌고 가 호송차에 실었어요.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그 말 못할 고문당한 것보다…… 억울한 징역 산 것보다 그 여자 목소리가 가끔 생각납니다. 그때 줄 맞춰 걷던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모두 그 강보를 돌아보던 것도.’
당시의 광경을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속수무책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을 그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소설은 한강이 칠 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삼 년 동안 쓴 제주 4.3사건에 관한 내용이다.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등반이 자유화될 때까지 무려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당한 사건이다.


3부로 쓴 이 소설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1부에서는 새, 폭설, 나무 등을 소재로 한 은유적이고 시적인 표현에 매료된다. 예를 들면, “젖은 실밥처럼 앞유리에 달라붙는 눈송이들은 잿빛 하늘과 아스팔트 사이의 허공을 촘촘히 꿰매는 무수한 흰 실들처럼 보였다”든가 “찰랑이는 촛물을 심지로 빨아들이며 타오르는 불꽃을 나는 보았다 (…) 너울대는 불꽃 안쪽에서 파르스름한 심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맥이 뛰는 씨앗 같았다”와 같은 환상적인 문장에 경도되어 읽다 보면 읽은 만큼 모호해져서 다시 읽어 보기도 하고 간간이 쉬어 가면서 읽어야 했다.

여느 소설처럼 아무렇지 않게 시작할 수 없는 내용이어서 그렇게 무의식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서술한 것일까. 2부와 3부에서는 ‘작별하지 않는다, 그림자들, 바람, 정적, 바다 아래, 불꽃’ 등을 소제목으로 썼고, 비로소 제주 4.3 사건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이는 2부를 먼저 읽고 다시 1부부터 읽어 보기를 권한다.

자료에 의하면, 4.3 사건으로 인한 총희생자 수는 추정 사망자 60,000 ~ 80,000명, 확인 사망자 10,715명, 3,171명이 실종되었고 일가족 전체가 몰살당하거나 학살 도중 육지로 도피해 살아남았어도 트라우마로 인해 신고조차 하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이 참혹한 사건으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주어가 없이 그냥 『작별하지 않는다』라고 책 제목을 쓴 까닭은 무엇일까. 누가 무엇 때문에 누구와 작별하지 못하는가…

이 소설을 읽고 비로소 4•3 사건으로 인해 일시에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잃은 채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 속에 살아가는 제주도민들을 생각한다. 그때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유언처럼 전하고자 하는 교훈을 되새겨본다.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라고 신형철 평론가는 언급했다.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부위별로 추려진 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사진들을 넘겨간다. 수천 개의 정강이뼈, 수천 개의 해골, 수만 개의 늑골 더미, 수백 개의 목도장들, 혁대 버클들, 중中 자가 새겨진 교복 단추들, 길이와 굵기가 다른 은비녀들, 유리알 속에 날개가 들어 있는 것 같은 구슬치기용 구슬들의 사진이 사백여 페이지에 걸쳐 흩어져 있다.’고 한 내용을 읽고 “내가 세상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책에 의해서 였다.”고 한 사르트르의 말을 실감하면서 새삼 글의 힘을 느낀다. 한강이 2024년 대한민국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여 아시아 작가로는 12년 만의 수상자이자 아시아 여성으로는 첫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해마다 문학계의 최대 관심사인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번역본이 아닌 한글 원본으로 읽을 수 있는 특별한 호사를 누렸다.
문학의 힘, 그 슬픔의 미학으로 완성된 『작별하지 않는다』가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로 읽히기를 바란다.

<유양희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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