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이 쓴 옛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퍽 공감이 가는 글이다. 어느 날 모처럼 고궁을 갔다가 나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는데 역사의 산물인 고궁과 시인이 생각하는 작은 일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일까 궁금했다.
그가 갔던 고궁은 어딜까. 대 사건이 명멸했던 경복궁일까, 마지막 제국의 운명이 오고 갔던 덕수궁일까. 그러나 그의 시가 탄생된 동기가 어디에 있든 작품으로 나온 시는 나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이를테면 고궁과 관계가 있을법한 역사적 사건이나 신문 헤드라인에 오를 일 따위와는 관계없이 시인은 사소한 음식 값이나 이발 요금이 비싼 것에 화가 났고, 그런 자신의 옹졸함에 짜증이 난다는 식으로 술회했지만 나 역시 시인의 생각에 백번이라도 동의하고 싶다.
그런 자신을 옹졸하다고 비하할 필요가 전혀 없다. 궁궐을 나오면서 왕자의 난을 떠올렸다든지 아니면 고종 같은 암군(暗君)을 생각했다는 시를 썼다면 김수영을 그저 그런 시인으로 치부했을 것 같다.
나야말로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심지어 비분강개한다. 요즘에는 식당에 갈 일을 대폭 줄인다. 밥값이 오른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거기에 붙은 세금과 세금보다 비싼 팁을 내면서 분노한다.
밥값이나 이발요금이 오르면 모든 물가가 덩달아 오르니 이 일을 어찌할꼬. 미국에서 물가 비싸기로는 뉴욕이 단연 선두라는 데도 몇 번이나 탈(脫)뉴욕을 감행했다가 다시 올 수밖에 없는 뉴욕사랑도 천정부지 물가 앞에서는 비감이 서린다.
김수영이 고궁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갑자기 식당이나 이발소를 생각하며 분개한다는 게 다소 생경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인간의 생각이란 반드시 어떤 기승전결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싸늘한 겨울 하늘을 바라보다가 돌연 뉴저지 사과밭이 떠오르기도 하고 비가 꾸물꾸물 내릴 때면 갑자기 대학 시절 자주 갔던 학교 앞 다방이 눈에 밟히기도 한다. 그건 참으로 짧은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지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건 모두가 다 인과관계가 없는 조각들이다.
아니 생각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마치 부스러기와도 같은 조각들이다. 그런데 그 사소한 편린들이 마치 수면 아래 엄청난 크기의 빙산을 숨겨 논 것처럼 뜻 모를 먹먹함에 휘말릴 때가 더러 있다. 참으로 모를 손 인간의 상념이다.
그러고 보면 “조그만 일, 작은 일에만 분개하고 화를 낸다”는 시인의 지적은 얕은 물가에서 일희일비하는 인간의 보편을 찌른 지적이다. 그래서 공감한다.
“아니 그걸 아직 생각해?” 그렇다. 나는 아직 생각한다. 벌써 잊어버리고도 남을 그 일을 잊지 못한다. 사소한 아픔, 아주 조그마한 기억들, 거기에 매어 사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민규는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 이 말의 의미를 새겨보라. 다른 사람과 엄청 달라서 그때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1% 작은 그것이 그 사람에게 가도록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은 간과하겠지만 내 시선을 강탈한 것은 남이 보지 못한 1%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너무 큰 것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부부사이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다툼의 저변을 보면 늘 작은 일이 화근이다. 더 가관인 것은 내 작은 일을 고집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반성이 없다. 새해에는 큰 것을 바란다거나 큰 변화를 기대하지 말자.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고 내일은 오늘의 연장일 뿐이다.
다윗도 작아서 눈에 띄었고 다윗 손에 들려진 무기도 작은 돌이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왜 그렇게 큰 것에 관대하고 작은 것에 분노하는지 모르겠다. 큰 성취만 눈에 차고 작은 성공은 눈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남을 도울 때도 크게 돕기를 바라고 작은 자선은 생략하는 경우가 우리의 일상이다. 차를 세웠을 때 걸인이 다가오면 어떻게든 시간차로 피하려 애를 쓴다. 그러다가도 차문을 열고 10불도 아니고 5불도 아닌 1불을 주면서 분노한다. 그렇다면 그 분노는 누구를 향한 사소한 분노인가. 바로 나의 인색함이 아니던가.
<
신석환/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