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일룡 칼럼: 눈

2025-01-10 (금) 12:00:00 문일룡 변호사, VA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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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워싱턴 지역 초중고는 대부분 4일간 휴교했다. 학생들은 겨울방학이 연장된 듯한 휴교로 즐거움을 만끽했다.
미국에서의 폭설 경험 중 잊지 못할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78년 2월 초였다. 2학기가 막 시작된 며칠 후, 월요일에 내리기 시작한 눈은 시속 92마일의 강풍을 동반하며 다음 날 아침까지 주 전역에 8~16인치가량 쌓였다. 주지사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자 대학 당국은 마지못해 2일간의 휴교를 결정했으나, 계속된 눈으로 인해 50년 만에 처음으로 3일간의 일기로 인한 휴교가 이루어졌다. 당시 보스턴 지역에는 총 29인치의 눈이 내렸다.

수업이 갑자기 중단되자 학생들은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기숙사에 거주하던 6천여 명의 학생들은 눈싸움, 눈사람 만들기, 눈조각 대회 등 다양한 활동을 즐겼다. 하버드야드에서는 스키슬로프로 둔갑한 와이드너 도서관 계단에서 스키점프 시합이 열렸고,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기는 학생들도 많았다.


하지만 학생들의 식사를 책임질 필요가 있었다. 인근 식당이 모두 문을 닫은 상황에서 기숙사 식당 직원들의 이동은 학교와 지역 경찰차를 통해 이루어졌다. 학생들이 눈을 즐기는 동안 이들을 지원하는 직원들의 책임은 더욱 커졌다. 공립학교에서도 눈이 올 때 주차장과 길을 치우는 직원들, 그리고 통학버스를 안전하게 운전해야 하는 기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경험은 1983년, 로스쿨 2학년 재학 중 구정을 맞아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집으로 가던 날이었다. 금요일 오전 11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출발하려 했는데 학부생 여자 후배가 라이드를 부탁해 동행하게 되었다. 점심은 3시간 거리의 집에 도착해서 먹을 계획이었다.

윌리엄스버그를 떠나 리치먼드를 지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출발 전에 일기 예보를 확인하지 않은 탓에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며 프레더릭스버그에 이르렀을 때 고속도로는 정체되었다. 한 곳에서 2시간 이상 멈춰 있기도 했다. 배고픔이 밀려왔지만 차 안에 먹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연료를 아끼기 위해 엔진을 꺼두어 차 안은 점점 추워졌다. 차 앞 유리창에 눈이 쌓였으나 와이퍼가 얼어붙어 밖으로 나가 손으로 눈을 치워야 했다. 그러나 신발과 양말이 젖고 얼어버려 나중에는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체면을 무릅쓰고 후배에게 대신 나가서 눈을 치워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로컬 길인 1번 도로로 나섰지만,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언덕에 도달할 때마다 한 차씩만 오를 수 있었고 차량들이 뒤로 미끄러지고 눈에 빠지는 사고가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언덕 아래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함께 차를 눈에서 끌어내고 밀며 언덕을 넘었다. 밤이 깊어지고 저녁시간도 지났으나 추위와 지침으로 배고픔조차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후배에게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중간에서 만날 수 있는지 여쭈어 보라고 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공중전화를 사용하고 돌아온 후배는 눈물투성이였다. 이런 날 굳이 오느냐며 야단을 맞았고, 부모님은 근처 모텔에서 머물 것을 권하셨단다. 학생 주머니에 모텔비는 궁했다. 아마 방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 후배와 같이 밤을 넘길 수는 더욱 없었다. 후배를 달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후배 집 동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쌓인 눈으로 인해 차량 운행이 불가능한 상황이 이해되었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 걸어가 후배 집에 도착했으나 집 안 분위기는 냉랭했다. 또 다른 딸도 친구들과 먼 곳 대학에서 오는 중인데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라면 한 그릇을 부탁해 조용히 먹고 나와 내 집으로 향했다. 집 동네에 와서도 길가에 그냥 차를 그냥 두고 집으로 걸어갔다. 도착하니 밤 12시 반, 출발한 지 13시간 반 만이었다.

그래도 다음 날 친구들과의 약속은 지켰다. 저녁에 워싱턴 D.C.로 같이 나갔고 돌아 오는 길에 다른 차 하나도 없는 14가 다리상에서 세 청년이 내려 포토맥 강을 쳐다 보며 차가운 밤공기를 만끽했다.

<문일룡 변호사, VA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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