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2024 연말, 와인에 관한 단상

2024-12-18 (수) 정숙희 논설위원
크게 작게
와인을 많이 마시게 되는 계절이다. 어느 모임이나 파티나 회식에서도 와인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20여년 전 한인사회에 와인문화가 처음 소개되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음료가 되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와인클래스에서는 어떻게 잔을 잡고, 얼마나 따르고, 잔을 들어 색깔 보고, 잔을 돌려 냄새 맡고, 한 모금 맛을 보는 일련의 테이스팅 공부가 가장 중요했을 만큼 와인은 낯선 문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 기초는 모르는 사람이 없고, 품종과 산지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져서 와인을 즐기는 수준이 몇 차원 업그레이드된 듯하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와인은 꽤 얼마 전부터 전성기를 지나 내리막길을 걷는 중이다. 세계적으로 와인 소비는 계속 줄고 있다. 특히 유럽의 와인소비량은 100년 전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다. 와인종주국 프랑스는 1926년 일인당 136리터를 마셨는데 2023년에는 40리터로 감소했다. 결국 지난해에는 재고로 쌓인 와인 4억병을 대거 폐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올림픽사이즈 수영장 100개 이상을 채울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프랑스 정부는 와인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폐기비용을 감수하는 한편, 와인을 증류해 향수나 세정제로 만들거나 포도밭을 갈아엎고 다른 용도로 변경하면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책도 내놓고 있다.


수십 년 호황이던 와인산업이 이처럼 하향세로 접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경제침체, MZ세대, 기후변화를 들고 있다.

첫째, 세계는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과하면서 유례없는 인플레이션과 경제침체를 겪었다. 경기가 나쁘면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데 쓰는 돈을 줄인다. 와인은 싼 것도 있지만 마실만한 와인은 같은 양이 맥주보다 최소 2~3배 비싸다. 인플레로 와인 생산비용이 올랐지만 소비는 줄었으니 이중고가 된다. 또한 와인을 많이 수입하던 중국이 내수침체에다 국내 와인생산을 늘리면서 수입량이 크게 준 것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둘째, 요즘 젊은이들은 와인보다 맥주나 기타 가벼운 음료를 선호한다. 와인부흥의 주체였던 베이비부머들이 은퇴하면서 그 자리를 메운 MZ들은 부모세대보다 수입은 적고 학자금 대출상환 부담이 커서 집 한칸도 장만하기 힘든 형편이다. 또 MZ의 문화는 크게 달라서 수제맥주에 열광하고, 여러 재료를 자유롭게 섞는 칵테일 제조법을 일종의 예술로 받아들인다. 과시욕보다는 실용적인 태도, 격식을 갖춘 식사보다는 간단하고 건강한 식사를 추구한다. 당연히 알코올 섭취도 적어서 하드셀처(Hard Seltzer)라는 과일향 나는 저 알코올 탄산수의 시장이 커지고 있다.

셋째, 요즘 지구상 모든 문제의 원인인 기후변화가 와인산업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갈수록 폭염 가뭄 홍수 냉해 우박 같은 현상들이 잦아지는데 예측 불가능한 기후변동은 포도농사에 직접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봄에 싹틀 때 갑자기 냉해가 오면 한해 농사를 망치게 되고, 한여름 폭염은 포도를 너무 푹 익게 만들어 섬세한 맛을 해친다. 온난화 때문에 포도 수확기가 계속 빨라지는 현상도 와인의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캘리포니아주는 가뭄과 산불로 인한 피해가 해마다 와인산업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 말고도 또 하나 치명적인 요인이 최근 등장했다. “술은 단 한잔이라도 건강에 해롭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2023년 발표가 그것이다. 과거 ‘식사 때 한잔 술은 약주’라 했고 ‘적포도주가 심장에 좋다’며 일부러 마시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의학이 이를 모두 부정하고 있다. 아직까지 연방식품 가이드라인은 성인 남성은 하루 두 잔, 여성은 한 잔까지 안전하다고 돼있지만 내년에 개정되는 새 가이드라인은 아마도 “소량의 알코올 섭취도 건강에 해롭다”는 내용이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베이비부머 와인애호가로서 이런 생각을 한다. 와인을 마시는 건 건강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와인은 선사시대부터 인류와 함께 해온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새겨진 연속적인 문화재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빚어내는 예술이고, 플라톤의 말처럼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그 아름다움과 열정과 환희를 마시는 것이다.

건강을 완벽하게 지키려면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말라니, 어떻게 사람이 몸에 좋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나. 그러려면 우리는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고기와 햄과 소시지도 먹지 말고, 비행기도 타지 말고, 자동차 운전도 하지 말아야하며 부상의 위험이 따르는 운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은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좋은 와인 한잔을 앞에 놓고 앉아있는 순간은 삶에서 맛볼 수 있는 드문 미감의 시간이다. 오로지 건강을 위해 그 즐거움을 포기하고 설렘과 흥분을 포기할 수는 없다.

연말이다. 곳곳에서 코르크 뽑는 소리와 와인 따르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한해가 아쉽다고 과음하면 안 되겠지만 절제 있게 즐기면 오히려 건강에 좋을 것이라고, 혼자 속으로 생각해본다.

<정숙희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