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2년 출간 사흘 만에 뉴욕서 사망
▶ 디아스포라·탈식민주의·여성주의 등 여러 장르 아우르며 ‘현대의 고전’돼
미주한인 작가 차학경을 1979년 그의 남동생 차학신이 찍은 사진. [BAMPFA 제공]
미주한인 예술가 차학경(테레사 학경 차)이 1982년 11월 미국에서 출간한 첫 책 ‘딕테(Dictee^사진)’는 그의 장례식날 유족에게 도착했다. 그는 출간 사흘 만에 미국 뉴욕에서 살인 사건에 휘말려 세상을 떠났다. 유작이 된 책은 42년 만에 한국에서 재출간됐다.
1951년 피란 당시 부산에서 태어난 차학경은 1962년 가족과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주한다.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미국 UC버클리대에서 문학과 예술 관련 4개 학위를 취득했다. 31세에 요절했지만 이방인으로의 삶은 책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책은 그가 다뤄온 디아스포라와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다문화주의 등을 문학과 역사, 천문학, 희극 등 여러 장르로 아우르면서 ‘현대의 고전’이 됐다.
뒤늦은 조명에 1997년과 2004년 국내에서 출간됐다 절판된 책이 부활했다. 출간 모금(북펀딩)에서 목표액 100만 원을 훌쩍 넘긴 4,000만 원이 모였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는 정식 발매 하루 만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작품을 제치고 종합 판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차학경의 유족 차학성 번역가는 “재출간으로 학경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 책 ‘딕테’가 태어난 지 42년 되었는데 여전한 관심이 놀랍고, 문학의 힘을 새삼 느낀다”고 말했다.
‘매우 난해한 텍스트’로 알려진 전위적인 책 ‘딕테’는 문자로만 읽히지 않는다. 사진, 영상, 도예, 행위예술 등 차학경의 다양한 예술 활동이 집약됐다. 가령 그의 책에는 일제 치하에서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의 숙소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되는 낙서 사진이 들어가 있다. 사진에는 ‘어머니 보고 싶어 / 배고파요 / 고향에 가고 싶다’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차학성씨는 “장례식을 치르고 집에 돌아와 책을 열었는데, 첫 장에 해당 문구가 있어 책을 덮었다”며 “어머니도 ‘딕테’를 힘들게 끝까지 읽었고, 많이 우셨다”고 전했다. 일제 치하 강제노역 노동자들의 고통이 딸의 절규로 읽혔으리라 짐작한다.
책은 유관순과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그리스 신화의 뮤즈들, 차학경 자신과 어머니 등 9명의 여성 인물을 통해 여성 발언권의 필요성을 환기한다. 억눌린 채로 차마 모국어, 즉 자신의 언어를 쓸 수 없었던 인물들의 말할 권리를 부각하는 ‘딕테’에 대해 차학성씨는 “테레사(차학경)는 ‘인간이 왜 말을 하는지’에 천착했다”고 설명했다. 책 제목은 프랑스어로 ‘받아쓰기’를 뜻한다.
책은 42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10여 년 전부터 미국 학계와 아시아계 등에서 주목하면서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디아스포라 등을 거론할 때 차학경과 그의 예술이 언급된다.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기도 한다. 그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오늘날 여전한 이유를 묻자 차학성씨는 동생과의 일화로 답을 갈음했다. “학경이에게 ‘왜 예술을 하나’라고 물었더니 ‘진실이기 때문에’라고 답하더라고요.”
‘딕테’의 첫 장에 차학경은 그리스 시인 사포를 인용해 “육신보다 더 적나라하고, 뼈대보다 더 강하며, 힘줄보다 더 질기고, 신경보다 더 예민한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이라고 썼다. 그의 염원은 이렇게 현실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