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 30일 나주에서 광주에 있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로 통학하던 박기옥(18세)이라는 여학생이 오후 6시 경에 나주역 앞에서 일본인 중학생 3명으로부터 희롱을 당했다.
이에 박기옥의 동생인 광주고보생 박준채(16세)가 그들에게 항의하자 일본인 학생들은 도리어 고함을 치며 덤벼들어 싸움이 되었다. 그때 역 구내에 있던 순사가 제지했다. 흥분한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들에게 “뒷날 다시 보자?”고 하자 순사는 박준채의 뺨을 때리고 끌어가려고 했다.
그 후 11월 3일은 소위 명치절(일본 메이지천황의 생일)로 광주 시내 각 학교 학생들이 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광주읍 우체국 앞에서 박기옥 학생의 일로 조선학생 일곱 명과 일본학생 십여 명이 난투극을 벌였다.
일본 학생이 단도를 가지고 조선 학생을 찌르려고 하자 부근에 있던 농업학교, 사범학교, 고등보통학교 등의 조선 학생 2백여 명이 달려오고 일본 중학생 180여 명이 또 달려와 큰 싸움이 됐다. 광주의 조선 여학생들은 붕대와 부상용 약품을 준비해서 조선 남학생을 응원하였고, 일본 여학생들은 돌을 주어다가 일본 남학생들에게 주어가며 응원하였다.(『신한민보』. 1930.1.23. 발췌요약)
이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들 간의 충돌은 조선의 학생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1929년 말에서 1930년 초까지 1,000여 명이 되는 광주 시내 조선 학생 대부분이 항쟁에 참여하였다. 일제는 170여 명의 조선 학생을 광주형무소에 투옥시켜 공판에 회부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조선 전역에서 참가한 학교가 194개, 학생 수는 5만 4,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퇴학 처분자는 582명, 무기정학은 2,330명, 피검자는 1,642명에 달했다.
1929년 11월 3일 발발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의 언론 검색으로 거의 20여 일이 늦은 11월 28일자 『신한민보』를 통해 재미 한인사회에 전달되었다. 하지만 『신한민보』는 이미 그 이전부터 조선사회에 대한 일제의 차별정책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보도해오고 있었다.
『신한민보』는 1927년 8월 25일자 신문에 광주공립보통학교의 조선인 교사들의 동맹휴업에 대한 기사를 시작으로 1933년 1월 19일까지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된 총 101건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들을 분석한 결과 재미 한인사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하여 세 가지의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1930년 1월 말에서 2월 중순까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면서 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재미 한인사회를 각성시키고 단결 의식이 고취되었다.
둘째는 2월 중순부터 4월까지 재미 한인사회는 조선학생독립운동을 미국 주류사회에 알리기 위한 선전 활동을 했다. 그 구체적인 선전 활동으로 ①영어 연설, ②신문 잡지 기사 게재, ③소책자 발간 등의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셋째로는 여러 재미 한인사회들이 구속된 학생들의 위문을 비롯하여 조선학생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후원금 모금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53년 ‘학생의 날’이라는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가 1973년 폐지되었다. ‘학생의 날’은 1984년 다시 부활되었다가 2006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으나 그 의미를 기리는 행사는 거의 없다.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광주학생의거의 날’이라고 해서 11월 3일을 기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19년 3·1운동 이후 최대의 대일민족항쟁이었고, 조선 학생들의 순수한 민족운동이었으며, 재미동포들의 관심과 성원이 이어졌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의미가 국내 뿐만 아니라 재미한인사회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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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완/코리안리서치센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