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며, 느끼며] 벌초하는 날

2024-09-13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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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열흘 앞두고 폭염주의보가 내릴 정도니 이번 여름 서울의 날씨가 얼마나 무더운지 짐작할 수 있겠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뚝뚝 떨어지다 보니 처서(處暑)가 지나도 벌초할 생각을 못했는데 지난 7일 잠시 날씨가 좋아졌다. 햇볕이 강하지 않고 날이 적당히 흐렸다. 비에 젖으면 풀이 잘 베어지지 않는데 다행히 비 소식도 없다.

이에 산소가 있는 후손들은 조상 묘나 공원묘지를 찾아갔다. 중부 내륙고속도로의 충주 휴게소도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통감자, 옥수수 등의 간식을 사는, 벌초하러 가는 이들로 붐볐다.

추석 전 한 달은 벌초(伐草) 시즌이다. 벌초는 조상 묘에 자란 잡초를 정리하는 작업을 말한다. 백중(음력 7월15일)이 지나고 음력 7월 말부터 추석 전까지 벌초를 하는 것은 처서가 되면 풀의 성장이 멈추니 깎은 잔디가 오래 유지되는 것이다.


일 년 동안 산소를 찾지 않았다면 무릎 위로 자라난 잡초들, 산길의 풀들이 엉켜서 발목을 잡기도 하고 높이 자란 나무들은 지나가기 힘들어 나뭇가지를 쳐내면서 걸어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조상 묘에 풀이 무성하면 불효로 인식했고 ‘추석 전에 벌초를 안하면 가시덤불 쓰고 명절 지내러 온다’는 관련 속담도 있다. 보통 일년에 봄 가을 두 번 벌초를 한다.

7일, 벌초를 하러 서울, 인천, 대구에서 온 10명의 사촌들은 거의 60대이다. 80대 아저씨들은 벌초 현장에서 은퇴했다. 이 날 벌초해야 할 묘소는 모두 8봉이다.
벌초하는 날엔 긴팔, 긴바지는 필수이고 벌에 쏘일까 얼굴 가리는 캡, 낫, 갈퀴, 삽, 목장갑, 벌레퇴치약, 아이스 워터 등이 준비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에 도착해보니 풀이 하늘로 치솟아있고 산소 가는 길이 사라져서 심란하기 이를데 없다.
안전망을 착용하고 걸친 남자 둘이 서로 멀리 떨어져서 예초기를 돌리며 풀을 깎아나간다.

칼날을 조심해 다루어야 하고 돌멩이가 튀지 않게, 벌집도 있는지 살펴야 한다. 무성한 풀에 숨은 뱀, 왕사마귀, 개미도 조심해야 한다.
남자들은 낫으로 잡초와 쓸데없는 나뭇가지들을 쳐낸다. 풀이 깎이고 주변의 잡초들이 정리되니 동그라니 솟아 오른 봉분이 그렇게 깔끔하고 예쁠 수가 없다.

여자들은 상석에 놓을 간단한 과일, 포 등 제수 음식을 일회용 접시에 준비한다. 술 한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한 다음 벌초할 장소로 옮겨가는데 중노동이다 보니 땀범벅이 된다.

지난 여름이 워낙 무덥다 보니 산소의 흙이 말라서 푸슬푸슬 떨어지기도 하고 잔디가 누렇게 변해서 듬성듬성한 곳이 많다. 이구동성으로 “내년 한식날 무너진 묘지 봉분 잔디를 보수해야겠다.”고 말한다.


산을 오르내리며 묘소 벌초를 다 하고 나니 지친 가운데도 다들 개운한 얼굴이다. 조상의 묘가 깔끔하게 이발을 하니 마음도 개운한 것이다. 힘든 일을 한 저녁에는 세상없어도 고기를 구워먹어야 한다. 떠들썩하게 얘기하고 웃으면서 고스톱을 치고 노래방도 이용해야 한다.

노년에 들어선 이들의 삶은 다사다난하다. 아내가 오랜시간 병석에 누워있고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벌초하는 날만은 세상만사 시름을 잊어버리고 “조상님들, 낳아주고 키워주셔 감사합니다”하는 마음만 있다. 이들도 언제까지 모일지 모른다. 소문대로 고향 인근에 신공항이 생기고 철도와 도로가 확장되면 본가와 마을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코로나19 이후 벌초 대행서비스가 늘었고 화장이 대세가 되었다. 친환경 수목장을 택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전통적 매장에서 코로나19 이후 화장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또한, 2019년 인간퇴비를 최초로 합법화한 워싱턴 주에 이어 뉴욕도 미국서 6번째로 2022년 12월 인간퇴비장 허용법안이 통과되었다. 사망 약 30일 뒤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보다도 오대양 육대주, 같은 미국이라도 각 주에 흩어져 사는데 특정지역에 있는 묘소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 지켜지고 있는 벌초하는 날은 남다른 감명을 주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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