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빈 그릇’

2024-09-03 (화) 조동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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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위에
빈 그릇 두었더니
비가 와서 채웁니다
그 물을
새가 와서 먹고 세수하고
벌이 와서 먹고 목욕하고
그래도 남아서
고양이가 얌전히 먹는 걸 봅니다
그릇을 비워두니
오는 대로 주인입니다

‘빈 그릇’ 조동례

쯔쯧- 오는 대로 주인이라니. 담장 위에 빈 그릇을 누가 놓았는가? 탈선한 청소년처럼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쏟아지던 빗물이 누구 때문에 고였는가? 그 귀한 빗물을 새가 와서 세수하고, 벌이 와서 목욕하도록 두었단 말인가. 겨우 남은 빗물을 고양이가 먹도록 놔두었단 말인가. 얌전히도 먹는다고 좋아한단 말인가. 새한테 까마중 열매라도 한 알, 벌한테 쓰디쓴 가짜 꿀이라도 한 모금, 고양이한테 금 간 유리구슬이라도 한 알씩 물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대를 몰라도 너무 모르지 않는가. 생명주의 아닌 자본주의 시대인 것을! [시인 반칠환]

<조동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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