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화산책> 청포도

2024-08-30 (금) 이정훈 기자
크게 작게
밤 12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읽고 있다. 밤 12시에 왠 청승이냐고요? 더구나 시벨리우스의 음악과 이육사라…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 그러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이 환상의 조합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애수…? 향수…? 뭐 이런 감정이겠지만 특히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깊은 밤에 들어야 제격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뭐 이런 분위기때문이 아니라 마치 우주의 천체쇼라고나할까, 우주의 정기라고나할까, 밤하늘의 별들이 토해내는… 진한 연애편지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별들이 전해오는 텔레파시… 그들이 전하는 연애편지가 어떤 느낌이냐고요? 알고 싶은 사람들은 지금 당장 밤 12시를 기다려 이 음악을 들어보면된다. 말 그대로 연애편지같다는 말외에 다른 표현할 말이 없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느냐고요? 그것은 나 한사람만의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밤 12시가 넘어서… 그 시간에 꼭 깨어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오는 이 가슴저려오는 음악… 언젠가 모 한국의 일간지 칼럼니스트의 글(아르떼 칼럼/택시에서 듣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이은아)을 읽다가 똑같은 체험을 적은 글을 읽은 적이있는데 어느 정도 음악적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모두 같은 체험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느낌을 詩로 대입해 보면 이육사의 시가 전하는 고향의 모습과 닮아있다. 향수, 사랑… 이런 것들에서 순수를 배제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란 없다. 과연 순수가 없는 향수… 그리움이나 연애편지 같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나 있는 것일까?

내가 이육사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詩가 아름답기도 하기 때문이지만 이 시가 전하는 어떤 특별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다. 단순히 고향, 향수의 느낌이라기 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그리움을 담고 있다고나할까.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시 청포도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예전에 살던 집, 길 건너 큰 포도밭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때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황금기였을 것이다. 사춘기를 막 지나던 그때 청포도가 익어가는 8월은 밤이 온통 낮이되는 계절이기도 하였다. 포도밭 주인이 포도 서리를 예방하느라 온통 포도밭에 불을 대낮처럼 켜놨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큰 규모의 포도밭이었는데 포도나무가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반짝이던 8월… 그리고 포도가 영그는 9월로 접어드는 그 시기 나는 어떤 못 생긴 여학생을 좋아하고 있었다. 못생겼다는 표현은 조금 주관적인 관점이겠지만 아무튼 너무 예쁜 얼굴 보다는 객관적으로 조금 못 생겼다 싶은 여학생이 발산하는 매력은 정말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물론 그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나혼자만의 착각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나는 정말 나자신이 하나의 시가 되고 자연이 되어 그리움이 겹쳐지는 나날을 보내곤 했었다.
나는 가끔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한다. 음악이야말로 인간의 언어로서는 도저히 적을 수도, 추억할수도 없는 찰라적인 황홀함, 작렬하는 불꽃놀이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은 때때로 음악을 듣고 또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누구에게나 보낼 수 있는 찰라의 음악… 불꽃놀이같은 순수한 연애편지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밤12시에 듣는 시벨리우스의 음악같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애송하는 국민시의 하나이다. ‘청포도’는 중학교 교과서에서도 실렸고 일제 강점기에 활약하던 대표적인 저항시의 하나로서 우리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한국적인 구수함과 내고향의 그리움을 진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집 앞… 알알이 맺했던 청포도는 그녀와 함께 먹던 핫도그의 추억이며 함께 맞던 밤눈, 함께 맡던 아카시아의 향기의 아스라한 추억이기도 하다. 여러분의 청포도 추억은 어떤 것이 있나요? 8월의 마지막 밤을… 이육사의 시와 시벨리우스의 협주곡을 (공짜) 연애편지(?)와 함께 띄워 보낸다.

청포도 /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정훈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