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그런 사람들, 그런 처지는 얼마나 다행이며 심지어 행복할까?
아무리 타인의 눈엔 불행해 보이고, 고통스러울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그들은 행복할 수 있고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는 경우가 꽤 있다.
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위, 재산, 명망 등을 모두 갖추었더라도 내면으로 들어갔을 때 감추고만 싶은 건강문제, 자식들 문제 등으로 내면의 깊은 고뇌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분들도 또한 적지 않게 있음이 세상사가 아니겠는가.
아픔이 어디 신체적, 물리적인 것만이 있겠는가. 정신적 아픔이야말로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어린 자식을 잃은 젊은 부모, 특히 엄마들, 지아비를 졸지에 잃고 어린 자식들이 줄줄이 달린 청상과부, 지겨웠을 것 같았어도 긴긴 세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며 금혼(金婚)을 함께 한 망구(望九) 나이의 한 노부부의 반쪽과의 이별, 어디 이런 이들의 슬픔과 아픔을 필설(筆舌)로 표현이 되겠는가.
이런 경우, 신의 존재에 의구심과 원망, 나아가 신의 존재 부정까지도 서슴지 않음을 이해한다. 간절히 필요할 때 안 계신 것 같은 신을 원망함을 탓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실의와 분노는 끝이 없다. 이때 잠깐 숨을 길게, 깊게 들이마시고 혼미한 정신을 되잡으며 생각해 보자.
이 절망을 한 가닥 희망으로 변화시킬 수는 정녕 없을까?
절망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막 희망의 시작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힘든 시간이 끝나면 막 희망의 시간의 시작이라는 것, 마치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지만 남은 인생은 축복의 시간의 시작이라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 아닐까. 체념이랄 수도 있지만 승화된 내면의 강인함이랄 수도 있겠고 후자에 더 기대를 걸고 싶다.
이런 절망과 고통은 결국 인간관계 맺어짐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가까워지고 깊이 친밀해질수록, 또한 그런 기간이 짧지만 급작스럽게 단절되거나 아주 오랜 기간 지속되었을 경우, 이별의 고통은 더욱 클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요즈음 한창 유행인 애완동물, 반려동물과의 섣부른 관계를 두려워한다. 이별의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오히려 반려 식물들, 꽃들을 더 가까이 하고 아낀다.
집사람은 특히 꽃을 유난히 좋아하고 정성스럽게 가지치고, 물주며 가꾸면서 그들과의 대화를 한다. 그들이 시들어지면 이별이지만 그래도 애완동물과의 이별과는 또 다르지 않겠는가. 이별의 아픔은 있겠으나 한결 부드러운 이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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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길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