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태문의 팝송산책

2024-08-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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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기의 아침 이슬 (1)

정태문의 팝송산책
김민기 그는 누구 인가 ? 다재 다능했던 그는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작사 작곡가, 편곡자, 극작가, 연극 연출가, 뮤지칼 기획자 및 연출가 그리고 가수 등 하나도 하기 힘든 일을 그는 그렇게 많은 것을 했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보이지 않게 행동하는 인격이었다. 본인 스스로가 자신을 뒷것 이라 하고 뒷편에서 일하는데 만족했다. 항상 공은 다른 동료에게 넘기고 묵묵히 본인에게 주어진 일에만 몰두하는 한 시대의 영웅인 그가 지난 7월 21일 73세의 나이로 하늘의 별이 되어 떠나갔다. 한국 가요계 그리고 연극계의 중추 역학을 한 그를 잃는 것은 문화계의 크나큰 손실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회화과를 전공했던 그는 재학중 고교 동창이자 같은 대학에 다닌 친구와 함께 듀엣으로 포크 송 그룹을 결성하여 취미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YMCA 에서 1970년 청개구리라는 포크 송 동아리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김민기는 서유석, 양희은 등과 친분을 쌓았다. 양희은은 어느날 한 모임에서 김민기가 통기타를 치면서 부른 노래를 들었는데 그 노래가 너무도 가슴에 와 닿아 그 노래에 대해 물었다. 김민기 왈 “내가 만들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악보를 찢어 벼렸어” 하고 건성적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양희은 재차 물었다 “ 제가 그 노래를 불려도 돼요 ? ” 그러자 김민기의 대답 “ 글쎄 내가 악보를 쓰레기 통에 버렸는데 아직 있는줄 몰라 내가 한번 찿아 보지 ” 허지만 운 좋겠도 찢어진 악보는 쓰레기 통에 그대로 있었고 찢어진 악보는 다시 복구되어 양희은은 김민기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 바로 녹음에 들어가 1971년 9월 1일 ‘아침 이슬’ 이란 타이틀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양희은의 아침 이슬이 예상 외로 좋은 반응을 보이자 이에 김민기도 정확히 40일 후 본인의 음반에 아침 이슬을 수록하여 발표했다.

‘아침 이슬 ’은 참으로 기구한 팔자 (?) 를 타고난 곡이다. 1973년 정부는아침 이슬을 건전가요로 선정했으나 2년 후에는 금지곡으로 지정하여 음악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가요 심의회는 정확한 금지 사유 이유를 밝히지 읺고 다만 일부 가사 내용을 문제 삼았다. 심사위원은 하필이면 불길하게 왜 태양은 묘지 위에 불게 타오르냐가 그 이유였다. 가사가 불순하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는 아침 이슬 노래가 대학생 데모 때 항쟁의 노래로 사용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후 김민기는 보안사에 끌러가 심한 고충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대인 기피증 까지 생겨 한동안 시골로 잠적하기도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1990년 북한은 아침 이슬을 선전용으로 적극 수입하여 주민 뿐만아니라 북한군에 까지 불리우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6년 다시 금지곡으로 낙인 찍어 못 부르게 했다. 남북한이 똑 같은 패턴으로 추천곡으로 선정했다가 금지곡으로 지정한 유래없는 노래이다.


그러나 양 정부당국은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사림들에게 못 부르게 금지하면 더 부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처음 이 곡이 음반으로 세상에 나욌을 땐 초도 물량인 3,000 장도 못 팔아 도매상과 소매상 매점에 쌓여 있었다. 허나 금지곡으로 지정되자 순식간에 모든 물량이 판매되어 나중엔 고가로 판매되는 촌극도 벌어졌다. 당국의 원하지 않은 협조(?)로 인해 돈 한푼 들이지 않고 광고를 해 준셈이다. 대한민국의 억압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은유하는 듯한 가사로 젊은 이들에겐 큰 반응을 받아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로 받아 들어졌다. 정작 작곡가 김민기에 의하면 자신의 노래가 사용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한다. 초창기에는 이로 인해 그는 많은 고초와 피해를 받았다. 그리곤 그의 인생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미술을 좋아하고 순수한 포크 음악을 사랑했던 그는 본의 아니게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인 인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이 여파로 인해 대인 공포증이 생겨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양지 보다 음지에서 생활하게 되는 운명을 맞이 하게되었다.

순수하게 자신이 만든 아침 이슬을 좋아했던 양희은을 위해 음반 녹음시 손수 편곡과 반주를 해주었던 김민기는 이로 인해 대중의 중심에 놓여 지게 되고 그 후 민주화를 강력히 원하는 세대의 우상이 되는 한편 정부 공권력으로 부터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혀 음악 활동을 중단해야하는 아픔을 겪었다. 희비가 교차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음악이 대중으로 부터 잊혀지는 시기 까지 숨죽여 기다려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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