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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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곱고곱다… 세상 끝 초록의 산수화

2024-07-26 (금) 울진=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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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 왕피천과 불영계곡

경북 울진은 서울에서 체감 거리가 가장 먼 곳 중 하나다. 속초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동해고속도로는 삼척~영덕 구간이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봉화에서 이어지는 36번 국도는 선형 개량으로 많이 직선화됐지만, 제한속도 시속 60km 왕복 2차선이라 여전히 느림보 도로다. 산과 바다 경관이 어느 곳보다 빼어나지만, 덕분에 여름휴가철에도 동해안 다른 지역에 비하면 한적한 편이다. 백두대간 동쪽 끝자락에서 흘러내리는 두 개의 울진 청정계곡을 소개한다.

■왕피천 깊은 골짜기에 굴구지 산촌마을

왕피천은 영양군 일월산 기슭에서 발원해 울진 깊은 산골짜기를 거쳐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지명에 무려 ‘왕(王)’ 자가 들어가게 된 데에 두 가지 설이 있다. 935년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임금의 어머니 송씨와 피신 왔다가 송씨는 별세하고 왕자는 금강산으로 갔다는 설이 하나다.


원나라 말기인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 31대 공민왕이 이곳으로 피신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왕이든 왕자든 일시 피신했다는 곳인데, 골짜기가 워낙 험하고 외진 곳이라 믿기지 않거니와 실제라 해도 길을 잃은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넋을 빼놓을 만큼 경관이 빼어나고 물이 맑아 피신처라기보다는 세상사와 담을 쌓은 이들의 자발적 은둔처라 하는 게 더 그럴듯해 보인다.

이 깊은 골짜기에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굴구지 마을 초입에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구산리 삼층석탑이 있고, 그 아래 경치 좋은 개울가에 청암정이라는 정자와 ‘학소대’라 이름한 절경이 남아 있다. 아쉽게도 청암정과 학소대는 사유지여서 들어갈 수 없는 상태다.

지형이 험준한 하천 상류는 지금도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 주인이다. 구불구불한 하천에는 세찬 물살에 빙글빙글 도는 자갈이 오랫동안 바위를 깎아 만든 돌개구멍, 탑이나 벽돌을 세워 놓은 것 같은 바위(토르), 오랜 세월 물과 바람에 깎인 수직절리 등 다양한 지질 구조가 발견돼 경북동해안지질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산양, 하늘다람쥐, 담비, 수달, 삵 등 쉽게 보기 힘든 동물과 꼬리진달래, 산작약, 솔나리, 노랑무늬붓꽃 등 희귀식물이 서식해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이기도 하다.

하천 중하류 굴구지 마을에서 여러 갈래의 탐방로가 개설돼 있는데, 당일 일정이면 3km 정도 떨어진 용소까지 다녀오는 게 일반적이다. 절반가량은 차량 통행이 불가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걷고, 나머지 구간은 옛날 하천 상류 주민들이 이용하던 오솔길과 물길을 따라간다.

포장도로에서 낮은 언덕을 넘어 옛길로 접어들면 짧은 숲길로 이어진다. 밤나무와 뽕나무가 많은 것으로 보아 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탐방로 주변이 원시림이나 다름없다.

숲속 오솔길을 통과하면 커다란 바위와 자갈, 모래가 뒤섞인 왕피천을 다시 만난다. 푸르스름한 기운을 머금은 투명하고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세상의 모든 소음은 사라지고, 바람소리 물소리를 제외하면 다소 오싹한 기운이 들 정도로 적막강산이다.

굵은 자갈이 뒹구는 하천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더 이상 갈 수 없는 바위 지형이다. 계곡 양쪽 바위는 닳고 닳아 하얗고 매끈한데, 바로 아래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형성돼 있다. 바로 ‘용소’라 부르는 곳이다. 투명한 에메랄드 물빛에 풍덩 몸을 던지고 싶지만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대신 용소 바로 아래는 수심이 얕아 참방참방 걸어볼 수 있다. 아쉬우나마 계곡 트레킹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한여름 햇볕이 수면에 너울지며 반짝인다.

정식 탐방로는 용소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산길로 이어진다. 굴구지 마을에서 상류 속사마을까지는 직선거리 4km 남짓하지만 찻길이 없다. 금강송면 소재지를 거쳐 돌아가면 무려 47km, 1시간 30분 이상 잡아야 한다. 굴구지나 속사나 세상 끝 마을이다.

■산태극수태극, 불영사계곡

왕피천 북쪽, 울진에서 영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를 따라 또 하나의 계곡이 이어진다. 공식적인 하천 이름은 광천이지만 통상 불영계곡으로 불린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맑은 물줄기와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기암괴석이 일찌감치 절경으로 소문난 곳이다. 1979년 명승에 이름을 올린 데 이어 1983년에는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무려 18km에 이르는 계곡을 따라 의상대, 창옥벽, 조계등, 노적바위, 부처바위, 소산 등의 바위 봉우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맑은 계류가 흐른다.

계곡 중심에 불영사가 있다. 산줄기는 계곡을 품고, 물줄기는 봉우리를 휘감는다. 그 모양새에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라는 멋들어진 별명을 붙였다. 바로 그 물줄기와 산줄기가 똬리를 튼 지형에 불영사가 자리 잡고 있다.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의상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을 닮았다 해서 산 이름을 천축산이라 짓고, 신비로운 주문으로 아홉 마리 용을 내쫓고 연못을 메워 절을 짓고 구룡사라 했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전설과 줄거리가 비슷하다. 사찰 서편 산줄기에 솟은 부처 형상의 바위가 경내 연못에 비쳐 지금의 불영사(佛影寺)라는 이름을 얻었다.

주차장에서 경내까지는 약 1.2km 숲길이 이어진다. 중간에 계곡을 지나는 다리를 건널 때면 맑은 물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사찰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다. 부처바위가 비치는 연못에 수련이 하나둘씩 말갛게 꽃을 피웠고, 노랑어리연꽃이 별을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린다. 연못을 중심으로 대웅보전, 명부전, 응진전, 칠성각, 극락전 등 경내를 한 바퀴 돌면 잠시 극락세계로 소풍을 온 듯한 평화로운 기운이 감돈다.

36번 국도를 터널과 교량으로 직선화한 후, 불영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옛 도로는 더욱 한산해졌다. 물길 따라 휘휘 돌아가는 구조라 속도를 내기 어렵다. 자연스럽게 주변 절경을 즐기며 천천히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이다. 그중에서도 경관이 빼어난 몇몇 곳에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는데 아쉽게도 계곡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불영사 하류에 공식적으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불영계곡 캠핑장’이 있고, 상류 ‘금강송휴게소’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탐방로가 연결돼 있다. 주차장 옆 전망대에 오르면 반대편으로 탐방로가 연결된다. 험한 바위에 뿌리 내린 소나무 사이로 낸 오솔길을 조금 내려가면 크게 굽이도는 광천 물줄기가 나타난다. 특별하게 즐길 건 없지만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잠시 여행의 피로를 씻을 수 있다.

<울진=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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