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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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없는 세상

2024-07-2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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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완전한 남가주 여름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폭염이 이어지고, 곳곳에서 산불이다. 주말에 갈만한 LA근교의 산행로도 이 때문에 막힌 곳이 많다. 이맘 때면 한동안 캘리포니아에서 반복되던 뉴스가 있었다. 블랙 아웃, 순차적 강제 단전이 바로 그것이다. 전력 부족이 원인이었다. 경고로 그친 때가 많지만 지역 별로 돌아가며 블랙 아웃이 단행된 것도 여러 번이다.

전기가 끊기면 도시는 일순 적막에 빠진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다. 엘리베이터는 운행을 중단하고, 운이 나쁘면 그 속에 갇히기도 한다. 직장인들은 달콤한 휴식의 순간을 강제로, 그러나 합법적으로 갖게 된다. 식당 등 업소 영업도 중단된다. 냉장고에 보관된 식재료가 상할까 마음을 졸이게 된다. 지난 주 IT 대란이 벌어지는 바람에 항공편 운항과 금융 서비스가 중단되는 등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전기가 끊어지면 이 정도가 아니다. 어느 새 전기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됐다. 생활이나 생존에 필수 요소처럼 된 것이다.

이런 전기가 없는 세상을 사는 미국인들이 있다. 지난 2022년 전기가 끊긴 미국 가정이 300만 가구가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중 30%는 여름 석 달간 전기가 끊겼다. 공급되는 전력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기료 낼 돈이 없어서였다. 요금을 내는 만큼만 전기가 배달되기 때문에 밀린 요금을 낸 후 수 일, 혹은 수 주 후 다시 끊기는 일이 반복되기도 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경제 사정 때문에 벌어지는 미국 가정의 단전 사태를 미국이 안고 있는 위기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에너지 정의’ 차원에서 이 문제는 국가가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한다. 단전도 인종차별적이다. 지난 팬데믹 때 요금을 체납해 전기가 끊기는 일을 겪은 가정은 흑인과 히스패닉이 백인보다 서너 배 많았다.

전기가 끊기면 30% 정도는 우선 돈을 꾸어 전기료부터 낸다. 전기료를 팍 낮춰 대비하는 가정도 있다. 에어컨, 히터 등은 호사품. 냉장고 코드를 빼고 살 수는 없다. 폭염이 쏟아지고, 북극 한파가 닥쳐도 아슬아슬할 정도의 실내 온도를 유지한다. 마른 행주 짜듯 절전에 나선다. 연방 빈곤선 200% 안에 드는 5,000 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런 응답을 얻었다.

정부 기관이나 전기회사가 제공하는 에너지 보조금으로 가까스로 단전 위기를 넘기는 경우도 많다. 전기회사가 부과한 전기요금과 각종 보조금과의 차액만 내는 이른바 빌 밸런싱(bill balancing)으로 단전을 면하고 있다고 답한 빈곤 가정이 조사 대상의 20% 가까이 됐다. 열 가정 중 한 가정은 친지에게 빌어 전기요금을 냈다고 답했다. 단전 사태는 계절적으로 전기 사용이 늘면서 요금도 덩달아 많아지는 여름에 많이 일어난다. 지역적으로는 서부나 동북부보다 동남부에 더 많다.

전기료를 못 내도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에는 단전 조처를 금지하는 주가 있는 등 에너지 정책은 주마다 차이가 크다. 난방과 냉방이 필수적인 때는 강제 단전을 금지하는 주가 절반 가까이 된다. 서부 쪽은 캘리포니아, 네바다, 애리조나 주 등이 그렇다. 동부는 워싱턴 DC, 버지니아, 뉴저지 등이 그렇지만 뉴욕과 플로리다 주에는 이런 규정이 없다.

지난 팬데믹 때 저소득 가정을 지원하기 위한 에너지 보조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 나면서 그나마 위기를 넘긴 가정이 많았다고 한다. 급격한 기후 변화로 예측하지 못한 폭염과 한파가 번갈아 닥치는 이 즈음, 의무교육처럼 모든 가정에 전기 공급은 기본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더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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