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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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날의 푸념

2024-06-24 (월) 이유찬 섄틸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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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온지는 그래 오래 된 것 같아도 시계를 들려 놓는다면 엊그제 같은데….
미국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고향에 내려갔다. 1월에 만기 제대하고, 어쩌고 저쩌고 핑계를 대면서 서울과 시골을 총알택시로 왔다갔다 집에는 잘못 들렀어도, 미국에 오기 위한 서류가 왜 그리 많았던지 동회와 시청, 세무서까지 서류미비로 꽤 많이 왕래를 하였다.

마지막 날! 내일은 김포공항을 떠나간다. 인사를 하러 갔다. 3년을 견디어야 하는데 거의 무일푼으로….
한국 군대 3년도 건강하게 견디어왔는데.
당시 100달러가 1인당 가지고 나갈 수 있는 할당액인데 돈도 모자라서 달랑 80달러만 갖고 나가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아침인사 식사는 며칠전에 하였고 그땐 무조건 “건강하게 다녀오라”는 말씀 뿐이었다 그래도 내일은 정말 떠나야지 하니 또 부모님이 보고 싶어졌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다. 식사는 절미하며 툇마루에 맞아서 작별 인사를 드렸다. “네가 참 대견스럽다”고 하신 부모님이 막상 떠나간다고 하니깐 안색이 달라지셨다.


미국에 가거던 “형무소와 병원을 멀리하고 근처에도 가지 말라” 하셨다. “네, 명심 하겠습니다” 하고 부리나케 서울로 올라왔다. 동기간 중에 말썽꾸러기가 있었나보다.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정작 운전을 할 수도 없고 면허증도 없는, 걸어다니는 신세였을 때였다. 나중에 받은 운전면허증은 소셜번호가 아닌 KO2로 시작되는 이상한 번호였다.

그리고 경찰차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운전해 다녔다. 영주권 얻기까지 거의 10년동안 계속 무사고 무티겟으로 살았다.

병원 문제는, 작아도 단단한 사람이어서 잔병치례 없이 십수년동안 살았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이다. 아들은 팬데믹 때문에 결혼식도 양가 부모님만 모여서 치룬 후 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올해 아버지 날은 어떻게 보낼거냐고 물었더니 대뜸 하는 말이 “나도 아버지인데요" 한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히 해석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나는 옛날 내 부모님의 말씀을 가슴에 갖고 있는데…우리 애들은 받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조금은 씁쓸하고 개운치 않은 아버지날이었다.

<이유찬 섄틸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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