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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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혼란으로 민주주의 시련

2024-05-30 (목) 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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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충돌이 점점 더 극한상황으로 갈수록 과연 한국에 민주주의가 존재하는지 여부가 확실치 않은 느낌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질식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4.19혁명으로 이룩해 낸 윤보선, 장면의 단명 민주당 정부는 무질서 혼란을 틈탄 박정희 군사 쿠데타에 의해 말살되었다. 민정이양과 대통령 직선제를 공약으로 내건 노태우 신군부 출신 후보 앞에 단일화 대국민 약속을 지키지 않은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패배해 5년간의 민주주의 실현이 지연되는 완충기를 겪었다.

이후 양 김과 노무현 대통령의 15년간은 우리 민주주의가 꽃피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시대를 지나면서 정부마다 친미, 친중, 친북노선 등으로 국가 정체성에 혼란기를 경험해야 했다. 윤석열 정부와 야당이 사법 리스크 방탄, 특검 거부권 행사 등으로 무한 투쟁에 접어들며 민주주의 본질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정치판의 극한대립은 죽어버린 민주주의의 심장에 칼을 꽂는 양상이 연상된다. 제22대 국회가 곧 열리지만 국면전환을 기대해 볼 근거가 매우 궁색하다. 국회에는 믿거나 말거나 무려 1만 6000여개의 법안이 적체, 폐기수순을 밟아야 할 상태다. 민생이 최우선이라고 생색을 내던 여야 정치인들은 개원을 앞두고 돌변해 탄핵과 거부권 총칼을 들고 대결 태세로 싸움 본색을 과시하고 있다.

야당의 탄핵 협박과 정부, 여당의 사법리스크도 이성을 잃어 이미 실성한 오늘의 정치판에서 민주주의를 복원해 보겠다는 노력 자체가 그야말로 ‘언발에 오줌 누기’ 같은 실망만 되풀이 할 것이다.

앞으로 정국은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에서 살아남기 위한 탄핵을 목표로 한 특검 등 갖가지 공세가 심화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여하한 일이 있어도 내 마누라(김건희 여사) 만큼은 법정에 불려나가 포토라인에 세우는 수모를 당할 수는 없다”라는 개인 감정에 취한 ‘거부권 행사’ 반복으로 정국 무한 충돌에 부채질을 더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정치인들의 난동에서 공정과 정의,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책무는 일반국민에게도 엄연히 있는데 그 기대마저 희박하여 안타깝다. 일찍이 명말청초의 명 재상 고염무는 “나라를 구하는 것은 높은 자리에 앉아 비단옷 입고 고기 먹는 자들 뿐만 아니라 필부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지금 우리 국민, 심리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확증 편향증'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아무리 “윤석열이 김건희 여사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정치판이 어지러워지고 있다"라고 설명을 해줘도 전혀 납득을 못하고 “그렇지 않다"라고 고집하는 사람, 아무리 “이재명이 최측근 5명이 자살을 했는데도 측근이 아니라거나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증언이 “거짓말이다"라고 설명을 해줘도 절대 이재명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펄쩍 뛰는 사람이 있다.

이런 종류의 ‘확증 편향증'에 걸린 사람이 많다면 정치 정상화도 어렵고 민주주의 구현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민주주의가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마당에 5.18민주화운동의 품격마저 격하되어 가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5.18 희생자 유족회, 실종자, 부상자 후원회 등의 조직에 생판 아무런 참여도, 인연도 없던 자들이 나타나 공로를 가로채고 가소롭게도 정치적 이득을 보려고 설쳐대는 바람에 내분이 있다는 보도다.

경건한 자세로 5.18 민주주의 수호투쟁을 전 국민적, 전국적 추앙으로 기려야 한다. 5.18 항쟁에 지역차별 스탬프를 찍어내는 치졸한 짓거리는 민주세력을 분열시키고 고립, 격하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일부 극우 아류들이 5.18 민주항쟁 세력을 ‘불순분자’ ‘폭도’ 운운 욕설을 퍼붓고 규탄대회까지도 한다는 소식이다. 광주 5,18 정신을 오도하여 처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얼마 전 타계한 5.18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 존 위컴이 한 기자회견에서 시위대를 가리켜 “Spoiled Brats: 버르장머리 없는 쥐새끼들”이라는 막말을 사용하여 통렬한 격분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나라의 민주주의가 소멸 돼 가는 아슬아슬한 분위기에서 또 이런 악담이 누군가에선가 나올지 걱정된다.

워싱턴 지역 동포 19만 명 가운데 불과 25여명이 참석한 5.18 추모행사에서 워싱턴호남향우회장이 5.18 민주항쟁의 헌법 전문 기록을 주장하고 앞으로는 향우회 이름을 빼고 한인회 이름으로 행사를 하자고 제안했다던데 그의 말에 십분 공감한다. 민주주의는 거저 지켜지는 게 아니다.
(571)326-6609 

<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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