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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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사랑

2024-05-24 (금) 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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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 있는 “펀치 볼”은 오래전 형성된 분화구 크레이터에 위치한 국립 태평양 기념묘지로 대략 5만3,000명의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한국 전쟁 및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와 그 가족의 마지막 안식처이다. 하와이 이름은 희생의 언덕이라는 의미의 ‘푸오와니아’이다. 얼마 전 우리 3남매는 작고하신 아버님이 하와이에 유학하시고 목사가 된 후 교포들과 설립한 교회의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후 ‘펀치 볼’에 들렸다. 전쟁기록 중 한국전에 관한 벽화를 보며 풍전등화 같았던 대한민국의 낙동강 전선과 인천상륙작전의 이야기도 다시 보았다. 그리고 한국전에서 숨진 젊은 미군들의 묘비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경치 좋고 평온한 이곳에서 와이키키 해변 쪽과 다이아몬드 헤드, 호놀룰루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니, 낭만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지나간 120년 전 시작된 미주 한인 역사와 그 후의 우리가정 이민 이야기의 애환이 겹겹이 마음속에 밀려온다. 저만치 보이는 평온한 바다란 뜻인 태평양에서는 하늘빛 옥색의 끝없는 파도가 희망과 슬픔을 실어 나른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한인 노동자들 102명이 인천에서 출발한 갤릭호를 타고 20일 동안 태평양 항해 끝에 1903년 1월 13일에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86명만 건강하여 최종 상륙허가를 받았다. 한국이 미국과 수교한 지 20여 년 만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요청과 이들을 도와준 감리교 선교사의 주선으로 온 것이다.

하와이에서 미국 기업인들이 본격적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이고 한때 설탕 수출이 하와이 총 수출액의 95%나 차지할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하와이 본토인들을 농장에 고용하였으나 일손이 달려 중국인, 포르투갈인, 일본인 등을 데려와 노동력을 확보하였다. 1890년대를 전후하여 중국인, 일본인들의 수가 너무 늘어나고 파업이 잦아 농장주들은 한국에서 노동력을 수입하기를 원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이민자들과 그 후에 사진만으로 남편감을 보고 시집온 젊은 사진신부들의 희생 끝에 한인들은 조금씩 뿌리를 내렸다. 작고하신 아버님이 목회하실 때도 초창기의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 어려운 삶속에서도 신앙과 한민족의 유산을 지켜가며 단합하여 교회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초기 이민자들의 피땀 어린 희생 위에 그 후손들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자랑스러운 이민자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으로 한인 이민이 시작될 때 또 그 후로도,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이 더 있다. 오히려 태평양을 건너 조선으로 건너온 젊은 미국선교사 들의 도움을 받아 나의 할머니는 기독교복음과 한글을 깨우치시며 칠곡군 숭오교회에 출석하셨다. 가난하고 무지했던 조선의 민중들을 위해 목숨 걸고 사랑을 전하러 온 미국 선교사들의 희생 때문에 마을 전체가 변화되었다. 그 덕에 나의 부친도 교육을 받게 되었고 세월이 흘러 나는 반대로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숭오교회는 금오산 자락, 평화롭고 조용한 곳에 위치하여 ‘태평마을’이라 불렸으나 한국동란 때 대한민국이 수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합동으로 공산군을 마지막으로 방어하며 자유를 지켰던 낙동강 전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의 현실 속에는 고통과 즐거움이 섞여 있다. 지나치게 비관할 필요도 없지만 반대로 삶이 늘 화창할 것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내려가는 사랑은 우리와 후손들의 삶속에 면면히 흘러갈 것이다.

<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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