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는 미래’ 사활 거는 동남아
▶말레이 40여 년 전부터 외자 유치
▶조립 넘어 설계 등 모든 공정 가능
▶ 후발주자 베트남도 국가전략 육성
▶설비투자 부담 적은 ‘설계’에 초점
▶대학들 관련 전공 신설·정원 2배로
▶“학생들 열기, 폭염보다 뜨거워”
#지난 6일 베트남 현지 최고 명문 공과대학 하노이과학기술대학교(HUST)의 한 강의실. 응우옌득민 전기전자공학부 교수의 집적회로(IC) 디자인 코스: 디지털 회로 설계 강좌를 듣는 학생 60여 명으로 가득 찼다. 이 수업은 HUST 학부 정규 수업이 아닌 민 교수가 반도체 분야에 관심 있는 3, 4학년 학생들을 위해 주말에만 별도로 개설한 16주 과정 특강이다. 디지털 전자 회로 설계와 합성, 시스템온칩(SoC) 설계 방법 등을 다룬다.
휴일을 쪼개 자발적으로 학교에 나온 학생들은 2시간 넘게 이어진 수업 내내 교수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쉬는 시간에도 강의에서 배운 이론을 바탕으로 베릴로그(반도체 설계에 사용되는 프로그램 언어)를 이용해 코드를 작성하거나, 강의 내용을 두고 교수와 열띤 토론도 벌였다. 바로 옆 연구실에서도 삼삼오오 모여 반도체 설계 회로를 가운데 두고 머리를 맞대 논의하는 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처음 강좌를 열 당시 모집 인원은 30명 안팎. 그러나 예상보다 3배 많은 학생들이 수업을 듣겠다고 나서면서 부랴부랴 정원을 조금 더 늘렸다. 민 교수가 이끌고 있는 IC설계 및 시스템 통합연구소 산하 EDABK 연구소를 관리하는 호앙프엉찌 박사는 “인원 제한 탓에 결국 수업 신청을 하지 못한 학생들도 학교에 나와 뒷자리에서 조용히 강의를 듣고 갈 정도로 반도체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다”고 설명했다.
수업에 참여한 전자통신과 3학년 부티후옌(21)은 “‘핫’한 산업인 반도체에 관심이 커 특강을 신청했다”며 “졸업 후 한국이나 대만 등 반도체 강국으로 유학 가 많은 경험을 쌓고 고국 발전과 (반도체) 산업 성공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동남아 각국 반도체 산업 육성 시동
이 수업은 점점 뜨거워지는 베트남 반도체 열기를 보여주는 일례다. 미국과 중국 갈등에 따른 공급망 다변화로 동남아시아가 새로운 반도체 생산 기지로 주목받으면서 각국도 산업 육성에 시동을 걸고 있다.
가장 앞서가는 나라는 말레이시아다. 40여 년 전부터 반도체 분야에 관심을 보인 말레이시아는 숙련된 노동력과 낮은 운영비용을 앞세워 외국 자본을 대거 유치해왔다. 미국과 독일, 네덜란드 반도체 회사의 산업 시설이 집중된 북동부 페낭은 ‘동남아의 실리콘밸리’로 불린다.
과거 업무는 완제품 조립에 그쳤지만, 점차 고도화하면서 이제는 ‘설계→제조→패키징·테스트’라는 단계별 반도체 공정이 모두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글로벌 회계법인 언스트앤영(EY)은 “동남아에서 칩 설계와 패키징이 가능한 국가 중 제조시설까지 갖춘 곳은 말레이시아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발맞춰 안와르 이브라힘 정부도 지난 22일 동남아 최대 규모 반도체 설계 단지 조성 방침을 밝히며 자국에 터를 잡는 기술 기업에 세제 혜택과 보조금, 비자 수수료 면제 등 각종 인센티브 제공 방침을 밝혔다.
베트남은 말레이시아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9월 하노이를 찾아 반도체 분야 협력을 강화하기로 하는 등 국제사회는 앞다퉈 베트남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반도체를 포함한 전자통신업은 베트남 최대 수출 산업으로 부상했다. 미국으로 수출된 베트남 반도체는 5억6,000만 달러(지난해 2월 기준)로, 1년 전(4억2,000만 달러)보다 75% 뛰었다. 말레이시아, 대만에 이은 아시아 3위 수준이다.
▲ 베트남, 반도체 설계로 성장 시동
다만 외형적 성장과 달리 산업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반도체 밸류체인(가치사슬) 가운데 베트남은 주로 설계와 후공정을 담당한다. 그마저도 인텔(미국), 앰코테크놀로지(미국), 하나마이크론(한국) 등 베트남에 위치한 하이테크 패키징·테스트 시설 대부분은 외자 기업이다. 칩 제조는 100% 해외에 의존한다.
설계는 그나마 앞으로 베트남이 큰 성장을 보일 것으로 여겨지는 분야다. 다른 국가에 비해 시장 진입이 늦었고, 여전히 대부분 외국 파트너사 주문에 따른 아웃소싱으로 이뤄지고 있긴 하지만, 베트남 최대 정보기술(IT)기업 FPT그룹의 반도체 자회사 ‘FPT반도체’와 국영 통신사 비엣텔 산하 ‘비엣텔하이테크(VHT)’ 두 회사가 몇 해 전부터 반도체 칩을 자체 설계하고 있다.
후발주자인 베트남이 설계에 우선순위를 둔 것은 ‘비용’ 때문으로 풀이된다. 반도체 집적회로 핵심 재료인 웨이퍼를 생산하려면 막대한 설비 투자가 필요하다. 베트남 일간 VN익스프레스는 “제조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가장 자본집약적인 단계로, 클린룸, 장비·기계를 설치하는 데 수십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반면 ‘우수 인력’이 핵심인 설계의 경우 진입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KOTRA) 베트남 다낭무역관 관계자는 “설계와 패키징, 테스트 분야는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하지 않고 인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초기 진입이 쉽다는 장점이 있다”며 “특히 베트남은 비용이 저렴하고 인적 자원이 풍부해 유리하다”고 설명다.
▲정부·사회, 반도체 인재 양성 위해 뛰어
정부와 교육계, IT전문가들의 초점 역시 인재 양성에 맞춰 있다. 현지 기획투자부와 정보통신부는 ‘반도체 산업 국가 전략’을 수립하고 2030년까지 반도체 관련 엔지니어 5만 명을 육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각 대학도 발 빠른 대응에 나섰다. HUST를 비롯해 하노이국립대, 호찌민국립대, 하노이 폴리텍대, 다낭대 등 베트남 주요 대학은 2024년 대입 시즌(8월)을 앞두고 반도체·IC설계 관련 전공을 신설하거나 입학 정원을 두 배 가까이 늘리기로 했다. 현지 매체 베트남플러스는 “일부 대학은 인재 모집 외에 더 나은 반도체 교육을 위해 IC설계 실험실과 전문 소프트웨어를 갖춘 실습 시설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입시를 준비 중인 ‘미래의 IT 인재’들도 반도체 관련 학과 입학을 꿈꾼다. 지난 9일과 13일 우정통신기술대, HUST 등 일부 대학에서 열린 고교생 대상 진로 상담 행사에는 하노이 인근 지역에서 온 학생 1,000여 명이 참석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HUST의 민 교수는 “모든 대학과 연구소, 협회가 반도체 관련 세미나를 열고 싶어 하고 언론도 매일 반도체 관련 이야기를 다룰 정도로 반도체는 2024년 베트남의 가장 중요한 이슈”라며 “베트남 반도체 열기가 하노이 여름 기온(섭씨 40도)보다 더 뜨겁다”고 말했다.
이어 “10년 전 반도체를 공부했던 학생들은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현재 학생들은 정부와 사회의 지지를 받고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됐다. 이 청년들이 베트남 반도체 산업의 미래라고 강하게 믿는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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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글 허경주 특파원>